예수님께 아버지가 주신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켰다고 하셨다. 하지만 정작 제자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보전되기는커녕 예수님을 믿는 이유로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제자들을 지켰다고 하시는 것일까? 또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엄청난 고난을 당하시는데도 기쁨이 있다고 하시면서 그 기쁨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이 충만히 가지게 하려고 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 이 기도를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말씀은 철저하게 무엇이 본질인지의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을 보전하고 지키겠다는 말씀도 아니고, 기쁨 역시 육신의 기쁨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기쁨을 생각해보면 사람에게 있어 육신이 고통 중에 있는 기쁨이란 없다고 볼 수 있다. 때로 마사지와 같은 것을 받을 때에 압통 이후의 시원함을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그런 것을 가지고 육신이 고통 가운데 있는 기쁨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새벽마다 나가서 축구를 한다. 그렇다고 축구라는 것이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같이 편하고 기쁜 것이 아니다. 육신은 죽어라고 뛰어 다니지만 그것이 좋고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축구가 좋은 자기 안에 있는 마음이나 욕구를 충족시키기 것에 자기 육신이 수고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쁨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 육신은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것은 이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는데 쓰라고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축구에 대한 욕망에 자기 육신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놀라움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육신의 능력을 뛰어 넘어서, 걷어서 가지 않아도 일이 되고, 수고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생기는 것을 신앙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육신을 주신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자기의 존재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것이다. 즉 구원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육신이 편할수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보다 근무시간이 짧지만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일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가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와 달라고 신앙하는 것이 또한 그렇다. 하지만 그런 것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을 축복으로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알과 아세라로 여기는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말씀과 이 성경은 육신의 세계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성경에서 현상계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로 나타난 것은 나타난 것이 본질이 아니라 그렇게 세상의 모든 물리적 세계로 나타나게 된 의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계획과 의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한 사람들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으로 회복한 사람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정체성이 자기에게 의미가 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즉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영의 영광을 표현할 형식인 육신을 가진 사람을 만드시고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육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표현할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는 육신의 삶을 보전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가진 이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육신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일에 자신들의 육신을 소모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나심으로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이 나타난 것과 같이.


제자들 중에는 야고보와 같이 교회시대 초장에 순교한 이도 있고, 또 사도 요한과 같이 육신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육신이 살아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사람도 있고, 또 바울과 같이 살 동안 그 육신의 모든 수고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모한 사람도 있고, 또한 제자들과 바울과 같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서 자기 육신의 삶을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에 소모한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기쁨이 되는 것은 육신은 심한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우리는 만드신) 뜻에 그 육신을 사용하고 드리는 것이 바로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을 본 받아서 많은 사도들도 그 육신의 삶을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소모하고 드린 것이다. 그렇게 삶을 영이신 하나님의 이름 곧 정체성을 표현하면서 살다보니 어떤 이는 죽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육신의 모든 수고를 복음을 위하여 소모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하기 위하여 성경을 기록했고, 또 루디아와 같이 자기의 집과 사업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기도 했고, 빌레몬이라는 사람과 또 자신은 할례를 중시하는 할례당이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유스도라는 사람과 같은 이도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은 그 삶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표현하는 것에 소모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성공해서 그 성공을 바탕으로 다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성공하는 사람을 돕고 후원하는 일에 매진한 사람들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소유와 공로를 성공과 선의 기준으로 삼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을 성공과 선함으로 삼고 있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은 바알과 아세라가 할 것이다. 그것은 그냥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고 모욕하는 것일 뿐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전된 사람, 그리고 육신의 삶을 소모하고 수고하는 어떻게 보면 힘든 삶이 기쁨이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 자기 운명인 사람들이다. 그것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자기 육신을 사용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연어가 죽음을 무릎 쓰고 출생지까지 가서 알을 낳는 것은 미련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자기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을 때 뜻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과 같이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전되고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한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 운명이기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생명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이미 아닌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온전한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님이시니 모든 것은 생명의 법과 같은 것이다. 노력한다고 생명이 되는 것은 없다. 생명은 생명의 본성으로 낳아지는 것이다. 날 때부터 생명이지 노력을 더 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노력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물을 것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에게 물을 일이다. 그것이 그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소유와 공로, 풍요와 다산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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