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23) 온전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6. 28. 10:35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의 이 기도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또 그들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심과 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 하나님을 자신의 신으로 섬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의외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면 오히려 두려워한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십자가와 부활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이시듯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의와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에 있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육신으로 살면서 겪는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문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 부족함은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간의 생각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사실 보편적인 생각이다.(물론 그 보편성이 바로 죄기는 하지만.) 그래서 여러 신들 중에서 자기에게 잘 해주는 신을 찾는 것이 사람의 기본 마음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앞에서 말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에서 시작해서 그 문제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온전한 신은 하나님이라고 믿는 차이 뿐이다. 하지만 어쩌랴?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부족하게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불량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의 모든 문제는 사실 여기서 시작된다. 사람을 부족하게 보느냐 아니면 온전하게 보느냐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부족하게 보는 관점은 모든 이방신들에게도 통용되는 신앙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것은 눈에 보이는 인생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든 아니면 어떤 신이든 찾아가서 부족한 육신이 힘든 세상을 살 동안에 겪는 문제에 대하여 해결을 기대하는 것은 이 육신의 삶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온전하지 못한 부족한 존재로 보는 것 역시 인생의 본질을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세상, 형이하학적인 이 현상계를 본질로 보면 사람은 너무나 연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어떤 신이든 찾아서 그 한계, 그 부족함을 메우려 한다. 


그리고 그런 시각은 당연히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므로 신이 반응하는 것 역시 눈에 보이는 세계의 공로와 소유를 드림에 신이 응답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찬물로 몸을 씻고 기도하거나, 빳빳한 신권으로 헌금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혹은 신이 정성을 보시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의 궤도 위에 착한 행실을 하면서 살고, 사람의 부족함을 감추는 고상함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육신으로 살 동안 문제의 해결)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안목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과 소유를 드림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고,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진 가치 기준에 의해서 자신을 보면 자신의 행동은 늘 부족하고, 소유는 늘 드리기 아까운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자신은 알기 때문에 그 자신이 전능하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감생심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그러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누군가가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 손사래 치거나 아니면 욕을 하고 비판하며 심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금욕’이 답인 양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억제하고, 적어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추함을 보이지 않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기준에 부족한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신앙의 힘으로 억제를 잘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여겨, 잠을 안자고 기도하고, 먹는 것을 참으려, 또한 억지로 행동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바로 그런 육신을 가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부정하게 여기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 삼기에 가장 좋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셨고, 또 이렇게 만드신 것이다. 다만 사람이 하나님이 만든 사람이라는 존재를 스스로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의 마음이 죄고 선악과이며 그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자신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사람이 부족하다고 여겨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생각, 그것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 그것이 구원이고 거듭남이며 회개고 생명이다.


그렇게 사람이 회복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거하실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주 거룩한 존재로 인식할 때 비로소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온전함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온전함을 사람 안에 있는 부정함을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알 고 있다.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 기준에 만족하는 상태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존재를 만드신 분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사람의 온전함에 대한 자기 기준이 잘못되었거나 그 중의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나면 하나님을 거짓 신으로 규정하고 떠나든지 아니면 자기의 기준을 바꿀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신앙의 시작이다.


그 시작이 하나님의 온전함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원래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과 영광이라는 내용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함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온전함은 사람이 원래 온전한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가 사람을 부정하게 여겼던 기준을 버리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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