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 했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면 빌라도는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주게 되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들 앞에서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 묻자 유대인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 왕이 없나이다.”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요 19:15)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왕 같지도 않고 하나님의 아들 같지도 않아서였다. 유대인들이 볼 때 율법을 어기고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고, 또 밀밭에서 밀을 까먹고, 성전에서 상을 엎는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안식일을 어기고, 하나님의 전에서 난동을 피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력을 보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그런 능력이 나올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을 자기 육신의 문제, 정치적 속국인 상황, 가난한 사람들이 넘치는 것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도 구하지 못하는 분이라는 것에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마저 외면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니 그 또한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그 생각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진 생각이었고,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가진 생각이며, 더 나아가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안목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신앙이란 그 안목을 가진 세계에서 예수님이 진정한 왕으로 또 그리스도로 보이는 세계로 전환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구속의 절기인 유월절에 하나님 백성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정말로 이 땅 위에서 왕이 되시리라 기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백성들도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시고 십자가를 진다고 하시니 그들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안목의 괴리를 보는 것이 세상과는 달랐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린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그렇게 힘없이 끌려가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안목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발을 씻기실 때와 또 기도하실 때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자기가 기대한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틀린 것이나 사기꾼이 아니라 자기가 저러고 있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베드로의 부인이다.


어쩌면 신앙의 여정에서 그런 절대 절명의 갈등과 선택은 필연일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신앙의 여정에서 진정한 생명을 얻으려 한다면 한번쯤은 자기가 알던 예수가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나서 선악의 가치관을 가친채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는데 그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보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다면 그 차이를 심각하게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런 갈등을 맞이한다면 ‘이 결정은 나를 지옥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싶을 정도의 신앙적 결단을 한번은 해야 할지도 모른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끝내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에 대한 개념을 버리지 않았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진, 그리스도는 이러해야 하고 왕은 이래야 한다는 기준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도 또 자기들의 왕이 되어 정치적인 또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민중운동가인 바라바를 선택했고, 결정적으로 자기들의 왕은 가이사 밖에 없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왕은 정치적인 왕이 전부고, 그들에게 구세주는 육신이 가진 가난의 문제 해결, 고상하지 못한 인생의 모습의 해결을 해 주는 메시아가 그들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왕을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문제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본질로 여기시는 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이 사회적인 문제 해결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때로 시끄럽게 까지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방신학이다 뭐다 하면서 교회가 사회적 약자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나 동성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거리로 뛰쳐나가기까지 하는 교회의 행동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선함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결국 바라바를 선택하고 가이사를 왕으로 섬기게 된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공산주의 국가가 자기 통치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자기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는 안목과 믿음으로 아무리 하나님이라 불러본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늑대가 아무리 푸른 풀을 양식으로 삼으려고 해도 되지 않듯이.


그런 안목과 신앙이 선택한 왕은 결국 가이사다. 즉 세상의 가치관이 자신을 다스릴 것이라는 것이다. 경쟁을 통해서 누가 더 가졌는지, 누가 더 공로를 쌓을 수 있는지에 의하여 선이 결정되는 세계가 자기의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의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결국은 다시 세상의 임금을 자기의 임금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마치 개가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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