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군병, 곧 군인은 누구인가? 군인은 나라 권력의 상징이다. 다시 말해서 나라가 추구하는 의를 집행하고 표현하고 나타내는 존재가 군인이다. 그런 군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세상의 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세상의 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의 의로움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거나 세상의 왕이 되려면 육신으로 이룬 공적이 있고 또 그 지위에 걸 맞는 소유-혈통이나 재물이나 배경이나 신분-가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의로움이다. 즉 소유와 공로, Do와 Have에 관하여 이룬 것이 있어야 의로워지는 세계가 바로 세상의 가치관이다. 그 세상의 군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세상의 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유대인들의 겉옷은 신분을 상징하기도 하고 광야에서 사는 그들에게 옷 이상으로 이불과 같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겉옷은 그 사람의 신분과 형편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입으셨던 겉옷은 붉은 옷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그것을 입혔다. 예수님께서 왕이라고 하는 것을 조롱하기 위하여 홍포를 입힌 것이다. 그 옷을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다.


사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신분을 나타내고, 또 나름의 기능을 가진 옷인데 그것을 찢어 버리면 소용이 없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을 비웃고자 붉은 옷을 입혔다가 그것을 찢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조롱한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은 예수님을 그렇게 조롱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은 붉은 색의 옷이다. 성경에서 붉은 것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을 의미한다. 아담이라는 말의 의도 ‘붉다.’, ‘사람’이라는 의미다. 붉은 옷을 입히고 그것을 찢어버린 것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며,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고서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느냐?’하는 조롱의 표현이다. 왕이라 하니 붉은 옷을 입혔다.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어떻게 왕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조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찢은 것은 그런 꼴로는 왕이든 하나님의 아들이든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사람이 사람의 본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려 하면 그것을 죄로 삼는다. 교양 없고 무식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겉옷, 곧 사회적인 신분이 잘 갖추어질수록 사람답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것을 감추면 감출수록 의롭게 되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이 부끄러워 입었던 무화과, 곧 율법-사람이 행동으로 지켜 의롭게 된다고 여기는 모든 법-으로 가리려 해도 그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아담의 옷을 삼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사람이 덧입어야 부끄러운 것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것이 가려진다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는 안목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사람이라는 존재 정체성을 가리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 정체성을 부끄럽게 여기는 죄를 사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사람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 앞에 사람이 짓는 유일하고 가장 큰 죄이기 때문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유대인들과 군병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찢은 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기에 너무 보잘 것 없는 예수님의 육신을 찢는 것과 같다. 즉 십자가에 못 박는 가치관이나 예수님의 겉옷을 찢는 것은 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의 아들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마음에 가진 의가 같으면 여러 가지 행동으로 나타나도 결국은 그 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속옷은 찢어지지 않았다. 겉옷이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면 속옷은 사람 안에 있는 의를 나타낸다. 겉옷이 형식이라면 속옷은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의 육신은 십자가에 상하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만 예수님의 의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의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이 우리 사람에게 복음이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은 우리 모든 인생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고 표현되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존재의 목적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우리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인)로서 살아가는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은 찢어지듯이 헌신되어지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소비되고 소진되는 것이나, 우리의 의는 찢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고, 우리 삶의 본질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육신의 삶은 겉옷이 찢어지듯 상하고 훼손되듯 소비되어질 때 비로소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육신이 상하시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난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으로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그것은 자기 육신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소비하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셨다. 그와 같이 우리도 이 육신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고 사용하며 사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믿음만 있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느냐?’와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소비하는 것이 자기 삶의 본질로 아는 사람이 그 육신을 타락한 것에 소비할 이유도 여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믿음만 있으면 성경은 어길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십자가가 뭔지 모르는 것이다. 


십자가를 아는데 삶을 방탕하게 살 방법이 없는 것이다. 자기 육신이 어떤 목적 아래 있는지를 깨닫고 그 깨달음이 생명의 유전자와 같이 자기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 전부인데 삶과 육신의 어떤 부분이 타락한 삶을 살고 성경을 어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법도, 그럴 존재도 하나님의 만드신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겉옷이 찢기시듯 육신은 찢기셨다. 우리 삶도 그렇다. 이 육신이 주를 위하여 사는 것에 귀찮을 이유도 없고, 아까울 것도 없다. 자기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목적은 보내신 이에게 있는데 누구 맘대로 아까워하고, 누구 맘대로 자기 육신이 찢어지듯 주를 위하여 소비되는 것을 귀찮아한단 말인가? 우리 삶도 예수님과 같이 찢기듯 소비되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비록 겉옷은 찢기듯 하여도 그 안에 있는 의는 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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