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날과 상황은 반드시 오기에 그 날에 실족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미워한다는 것은 다른 가치의 충돌이다. 살면서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인지,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과 방법이 어떠해야 가치 있는 것인지(잘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에 대항하는 것이 미움이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과 세상의 본질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하나님이 지으신 온전한 존재로 보시고, 세상은 사람을 부정하고 연약하게 본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곧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위한 것이라고 전하시나,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만물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인류의 기원을 물질에서 찾느라 과학에 매달리는 것이다.(과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세상과 예수님이 그렇게 다르다보니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미워한다면 예수님의 세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당연히 미워한다고 하셨다. 세상이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미워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이유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편인데 미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과 같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말씀을 성령과 연계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령님이 사람 마음 안에 오시면 결국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명이 같으면 가치관이 같아지는 것이다.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지가 다르다면 생명이 다른 것이다. 코끼리는 그 덩치에도 풀이 자기 생명 유지를 위하여 가치 있는 것이고, 족제비와 같은 것은 작지만 동물을 자기 생명 유지를 위하여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그렇다. 가치관이 다르다면 설사 금이 있다고 해도 다툴 일이 없다. 금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이 가지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 블로그를 적으면서 굳이 기독교인들이 가진 복음의 괴리를 언급하기도 하는 것은,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이 사용하는 평화통일과 한국이 사용하는 평화통일이 다른 것처럼.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이 교회를 미워하고 기독교인들을 개독교인이라고 욕하는 것은 가치관이 달라서가 아니라 질투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미워한다는 것은 가치에 대한 기준이 달라서 일어나는 갈등이지만,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나, 세상에서 성공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것이나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것에 있어서 가치 있는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같은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치 사자와 하이에나가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같은 고기를 다투는 것과 같이. 이것은 그냥 질투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가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날 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모를 때 아이들이 그것을 돌처럼 가지고 놀았듯이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모르다보니 돌처럼 버린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신이시고, 그 하나님의 존재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들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셨는데, 하나님을 존재로 섬기지 않고 늘 무엇을 해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지는 분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도 예수님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상이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미워했다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역시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증거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도 하나님의 아들도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들이기에 그 생명의 본성이 예수님과 같이 살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들의 삶이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으므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듯이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졌기에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인지만 알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오셔서 진리에 대하여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으로 살게 하는 영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의지하는 것에 있어 가장 기본이자 핵심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초인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신앙이 육신을 벗을수록 좋은 신앙이라고 여긴다. 아담처럼.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바로 아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는 바로 사람을 바꾸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의 가치관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사람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으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로 여기고, 행위와 소유를 가치로 보지 않고 존재가 있으면 행위가 비롯되고 생명의 정체성에 맞게 가질 수 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다 예비해 두셨음을 안다. 그리고 그것은 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본질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뜻과 목적, 그것이 세상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신 것이다.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그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시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어 예수님과 같은 삶을 나타내게 되므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듯 성령이 임한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상고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시다. 즉 성령이 그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 역시 성령으로 잉태됨과 같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뭔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고,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기에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이란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잉태케 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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