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를 볼 때 ‘저 모습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구나!’라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보이시려고 오셨다. 그리고 그 모습을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저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구나!’라고 깨닫는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십자가로 가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유익인 것이다. 물론 예수님으로서는 너무나 큰 고통이지만 십자가에서 사람의 정체성을 온전히 보여주셨기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이 예수님을 바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은혜이고 유익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심으로 그 뜻을 깨닫게 하실 성령이 오셨고, 그 성령께서 예수님이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보이심으로 그 보이신 뜻을 성령의 역사하심(잉태케 하심)으로 자기 생명이 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가진 온전한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죄 없는 사람이요, 의로운 사람이며, 세상을 심판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그랬듯이.


죄가 다른 것이 죄가 아니다. 죄는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이 죄다. 자동차가 움직일 수 없으면 죄고, 전구가 불이 들어오지 않으면 죄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을 벗어나면 죄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행위는 육신으로 사는 세계의 법에 따르면 된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사람 지으신 목적을 벗어난 것이 죄다. 이것을 전하셨는데 믿지 않고서 행위로 하나님께 의로워진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으니 죄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자리를 벗어난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으시고 기뻐하신 사람을 부끄럽고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 자리를 벗어난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은 의와 육신, 내용과 형식으로 하나 되는 존재의 관계인데,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공로를 세우고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선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는 것이 바로 죄다.


그것이 죄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죄를 벗은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은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가 없는 사람이 나타나면 죄를 벗지 못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책망을 받는 것이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서로를 책망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지만, 사회에서 죄를 지으면 심판을 받아 죄인들의 세계인 교도소로 가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이 된다는 것은 굉장한, 아니 본질적인 회복이다. 원래 그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성품과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쉬운 말로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뜻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 그것이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므로 성령이 오셔서 의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가 나온다는 것이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죄가 없을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의가 세상을 책망할 수 없겠지만,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은 당연히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하여 책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의가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 밖에 없다. 존재와 생명의 법이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이면 사람이지 반인반수가 없고, 생명이면 생명이지 반만 생명인 것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의와 죄에 대하여 온전히 회복된 하나님의 아들이 나온다는 것은 세상이 가진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는 것이 된다. 세상의 심판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이 가진 가치관, 세상이 의롭다고 또 선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의로 여기지 않으면 세상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예수님께서는 의복을 차려입고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세상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으셨기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세상의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세상의 심판은 늘 피라미드의 법이다. 재물을 더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이긴 것이다. 즉 더 의로운 것이다. 행위도 그렇다. 기도를 더 많이(물리적 시간으로) 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이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돈이 없고 기도를 적게 한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다. 심판이라는 것이 어차피 기준이 되는 것이 나타남으로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므로, 더 가진 자가 나오면 없는 자는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 임금이 가진 심판의 법이다.


이러한 세상의 심판을 성령이 오시면 책망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심판의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오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의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하심이 기준이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너무 잘 만들었다는 것이 선함이라는 것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지, 세상의 법과 가치관에서 겨루어 이기는 것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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