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을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말씀 가운데서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사랑하는 것을 미워하는가? 하는 것이 의심스러워야 한다.


비단 이 말씀이 아니라도 성경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핍박을 받는 것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주 많다. 그러다보니 지금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교회에 다니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분명히)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비난하는 것과 또 기독교인들을 ‘개독교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핍박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그건 그냥 아전인수적인 해석일 뿐.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계명이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서로 사랑하니 사람들이 미워할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누가 사랑하는 것을 비난하겠는가? 그것은 오히려 비난하는 이들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섬기고 자신을 십자가에 드려서 왕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과는 반대의 법으로 살기 때문이다. 세상은 서로 경쟁해서 이겨야 왕이 되는데, 예수님의 법은 섬기는 자리로 가서 왕이 되는 세계다. 세상의 법은 자기가 옳으면 그것을 주장해서 세상을 밝히는 것의 선한 것이고, 그것을 관철해서 성취하면 이룬 것이 되는데, 예수님은 세상의 하나 밖에 없는 의인이셨는데 죄인들이 예수님이 틀렸다고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하니 순순히 끌려가셔서 죽으신 법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의의 왕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반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 것은 사실 이것과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뭐 그런 꼴이냐?’며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 것에 끌려 가셨는데, 지금의 신앙인들은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비난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인들의 아우성’으로 간주하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 예수님과 전혀 반대의 법으로 살고 있고, 비난의 내용은 전혀 다름에도 비난이라는 것은 같은 것이라면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이라고 망상에 빠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신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의 경쟁방식이 아닌 삶을 살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겨서 피라미드의 위로 가서 이긴 자가 되는 것이 의로운 것이다. 이긴 것이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면 포로가 되고 종이 된다. 즉 지는 것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가진 하나님의 의로 세상을 이기려 한다. 세상의 방법과 같이, 자기가 가진 의의 과학적 실증, 논리적 우월성, 성공 사례의 우월성 등을 증거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해서 이기려 한다. 이것이 바로 피라미드의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런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법은 모르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파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 노릇하는 것이고, ‘주여!, 주여!’ 외치는 것이지만 자기 의에 매몰되어 알지 못한다. 이것이 어두움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신 그 미움은 그런 싸움의 상대로서 이기니까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싸움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은 낮은 자가 이기는 법이다. 그런데 자기가 믿는 의가 더 옳은 것이라고(더 높은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기려 하는 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할 일이겠는가? 그러니까 그렇게 이기려 하고, 그런 싸움으로 인하여 비난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가 아니다.


더욱이 많은 신앙인들이 자기가 주장하는 의를 자신도 지키지 못해서 결국은 역공을 받는 일이 허다하다 보니 갈수록 사회는 기독교인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선하다.’고 그렇게 주장하고, 그 논리로 세상 사람들을 압박하다 보니 교회의 목사가 횡령을 하고, 여성도와 추문을 일으키고, 장로가 사회적 비난을 받는 일들이 자기 발등을 찍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도 못하면서’, ‘꼴좋다’와 같은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 믿기 때문에 받는 비난이라 여기는 것이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비난이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이 그랬다. ‘난관에 봉착하는 것은 무엇을 몰라서가 아니라 무엇을 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의 법과 십자가의 도를 바로 안다면 그 길을 돌아서야, 아니 돌아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보이신 것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것으로 강력하게 이긴 것이 아니라, 져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죽으셨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그것이 이긴 것임을 깨닫게 되는 진정한 이김이 되는 법을 알고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섬기는 사람은 섬김으로 섬김을 받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즉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면 섬김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섬긴 사람으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게 되므로 자신을 섬긴 사람이 자기의 그리스도가 되는 그런 관계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의의 충돌이나 다름에 있어 이 법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 즉 더 아는 이, 더 밝은이가 그렇지 못한 이가 알 때(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서로 섬기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더 아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강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아니 정반대의 법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또 믿음에 대해서, 또한 육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세계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의 삶이고 생명의 법이다. 바로 이 법을 세상 사람들이 미워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보 같으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조롱한 사람들의 조롱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 와 보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불거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이미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란 조건을 붙이고서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보여 보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돌(율법)을 떡(사람이 지킬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육신이 초인적인 것이 아니냐?’고 조롱했던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선하게 또한 의롭고 옳게 여기는 이김의 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으로 이겨내니 세상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남들은 자기 육신을 본질로 알고 그 육신이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용을 쓰고 죽을힘을 다해 살고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그 육신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고 있으니 그 꼴이 참 바보 같아 조롱하고, 때로는 그 모습이 자기 양심을 찔러 비난했지만 그것이 결국 사람을 바꾸어내는 기적을 만드는 것을 보니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어떤 미움에 처했는가를 알아야 한다. 일부러 그 미움에 들어간다고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삶을 살기에 당하는 것이다. 무엇이 먼저인지 알아야 한다. 정체성이 먼저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하신 것은 제자들이 세상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더 밝히 알아서 그 우월감으로 사람들을 이겨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아는 그 법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바보 같은 삶을 살게 하니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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