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포도나무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는 말씀도 하신다. 물론 이 말씀은 같은 의미의 말씀이기도 하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서 포도를 맺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시고, 가지는 그 안에 있어야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나, 사랑 안에 거하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나 같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서로 의미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이고, 생명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계명이란 생명의 본성과 같아서 본성을 거스를 수 없으니 지킬 수밖에 없는 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것이 기쁨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기쁨이 또한 우리 안에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이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너희’라 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의 기쁨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오신 분에게 있어 가장 기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기쁨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그 기쁨,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기쁨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여 뜻하신 바가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것을 받은 사람이 다시 그것을 전하기 위하여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계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명이 바로 사랑이라고 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에게 온전하게 전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흙에 불과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는 존재, 곧 생령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나,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으셨다는 것이나 같은 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사람이라는 존재가 의미가 있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고 관계인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내가 너를 불렀을 때 너는 내게 다가와 꽃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먼저 표현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의 육신으로 표현되면 그 사람의 생명(목숨이 아니라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해 내는(말씀이 육신이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우리의 격이 같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 안에서 같다는 것이다. 사과는 이 집에 있는 것이나 저 집에 있는 것이나 사과는 다 사과인 것 같이. 그리고 모든 사과를 어우르는 사과, 곧 사과라는 생명의 이름으로서의 ‘사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심과 같이 우리도 하면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것이니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새 계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의와 뜻)을 육신으로 나타내셨듯이 제자들도 또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와 같은 오늘 우리도 육신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이 나타나도록 하라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예수님과 우리는 같은 격, 곧 같이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기에 이제는 예수님과 포도라는 생명을 함께 공유하는 친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종과 주인은 친구가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분 곧 정체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격이 같으면 친구가 되는 것이다. 유유상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려면 예수님과 격이 같아야 한다. 그러니까 존재의 정체성이 같아야 하고 생명이 같아야 한다.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인데, 하나님께 공로를 드리려 하고, 또 자기 소유의 일부를 드려서 뻥 튀기듯 보상을 받으려는(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이 아닌 소유와 공로의 신으로 섬기는 본성을 가지고는 예수님과 친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같은 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을 예수님과 같은 안목으로 보는 사람,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기에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육신을 가진 삶을 부정하게 여기지 않고 이 육신을 가진 삶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형식이요 그릇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는 것은 다른 사람 역시 그런 목적 아래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육신의 삶을 드려(소비해서, 바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지으신 인생들에게 그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설명하시려고 그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 사랑의 표상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드려진 것이듯, 예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 계명대로 자신도 육신을 드려서 사람에게 육신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겠노라며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자리로 보내 달라’고 기도한다. 선교를 하겠다는 등,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겠다는 등.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하나님을 위하여 소비할 육신을 주시고, 그것을 소비할 삶을 주셨다. 다만 우리가 이 육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육신을 가진 사람의 본성을 부정하게만 여기고, 육신의 한계를 넘는 것을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자기 기준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어두워서 그렇지, 이미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그냥 이 육신을 드려 서로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그냥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과 같은 격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종은 끊임없이 그 수고를 드려서 인정받아야 하지만 친구와 아들은 그 정체성 자체로서 유지되는 관계다. 즉 공로 없이 존재로서 같은 격을 나누는 사이인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신을 드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였듯이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 육신을 드려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 그것이다. 육신을 부정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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