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고 하셨다. 어떻게 보면 모호한 말씀인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뜻이다. 즉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는 말씀이다.(예수님은 이전에도 이 말씀을 유대인들 앞에서 하신 적이 있다. 그때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했었다(요 11:30-31))


이는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말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기에 당연히 예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같은 존재인가? 삼위일체를 생각할 때 그것이 어렵게 이해되는 사람들의 생각도 그것이다. 어떻게 다른 세 개의 개체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것을 동일한 개체가 되는 것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눈에 다르게 보이는 것이 하나가 된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시고, 또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이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라고 하시는 것은 같은 개체가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를 바라시며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령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생명이 되시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도록 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과 뜻을 자기 삶의 존재 의미로 삼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임하시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개념이다. 요리사가 칼을 잘 다루면 ‘한 몸이 되었다’나 ‘혹은 몸과 하나인 것 같이 사용한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도 자기가 물건을 만들고 자신이 그 물건을 만든 목적대로 사용되는 것을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라는 것은 너무 당연하게 다가온다. 다른 것 볼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만 제대로 알아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신 것이나, 삼위일체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모든 인생을 대표하시는 분이다. 그것은 어떤 인생이라도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그 삶으로 나타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 지으신 목적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 뜻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가 바로 아들이다. 그러니 아버지(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이 그 관계를 증명함)와 예수님이 하나라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닌 것이다.


주제와 약간 간격이 있을지 모르지만 삼위일체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뜻을 가지신 분, 성자는 그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신 예수님,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사람에게 표현되신 예수님을 깨달을 때 그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게 하는 감동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콜라가 콜라병에 담기고, 콜라를 마시는 사람이 콜라가 목적한 시원함을 느끼는 것이라는 이 세 가지가 하나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몰라도 삼위일체가 이해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어렵다고 겁을 주며 설교하고 공부해야할 것으로 궁리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란 다른 개체가 하나의 개체(눈에 보이는 형상 같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안목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모든 것은 아버지가 하시는 것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이신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인 것이다. 이는 콜라병과 콜라가 하나된 것과 같은 것이고, 작가의 생각이 표현된 책이 작가와 하나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것은 다 안에 계신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뜻대로 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늘 ‘내가 자의로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아주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본성과 같은 생명의 특성을 보일 것이기에,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그의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의지와 신념과 생각 같은 것으로 인하지 않고,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어떤 부분이라도 그 마음 안에서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으로 하고 있다면, 싫지만 해야 하는 것이라서 각오를 다지고 억지로라도 해야 될 것 같고, 그래야 한다고 해서 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거듭난 삶이 아니라는 증거가 이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비밀, 생명의 본성 즉 존재의 목적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이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같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이미지, 성품)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임을 아는 비밀을 안다면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의 운명이고 삶의 목적이며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같은 개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생각은 다른 생각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일이라도 자기 뜻대로 되어야 적정이 풀리는 사람,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것이 옳고 의로운 것이고 생각하는 사람(물론 그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나 도덕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래봤자 물론 세상적인 관점인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이다. 그게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선악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고 말하는 사람은 ‘나는 선악과를 먹었고, 나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사람이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물론 그게 그것인지 모르는 어두움 속에서 그러는 것이지만. 알고서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을 사람들이 모르고 어둠 속에 있으니 예수님은 이 비밀을 모르겠으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서라도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네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음을 믿으라고 하셨다. 그렇지 못하겠으면 행하는 그 일을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예수님이 하신 일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와 뜻이 표현된 아들이시며, 육신의 존재 목적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육신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형식이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내용이라는 것을 모르겠더라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인데, 여기서 핵심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으라고 하신 <하신 일>이라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걸으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이 아니다. 왜 그것이 아닌가 하면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선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한 일>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십자가가 도무지 왜 이렇게 중요한가 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바로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의 정체성을 설명하셨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사는 삶의 목적과 의미를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예수님의 일은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는 일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 목적을 위해서는 이 육신이라는 존재는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심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압박하는 그것 앞에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나타난 것이 그것이다. 세상은 이 육신을 가진 삶이 부정하다고 여긴다. 육신의 생각은 늘 죄로 가득하고 악한 것이기에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옷(신분)을 입어 자신을 가지고, 생각하여 그것을 극복하려 하고, 손과 발로 그런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감추려 한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심판할 때 그렇게 된다. 세상의 가치관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고, 내 생각이 옳다고 홍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만들지도 않았고 주인도 아닌 세상의 일을 주관하려는 것이기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일 뿐 전혀 선한 것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선한 가치를 지키려 한다고 해도.


그런 가치관에 의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는 발가벗겨져서 달리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은 손과 발에는 못이 박히셨다. 신분도, 생각도 손과 발의 행위도 사람이 가진 본래의 모습을 감출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적 가치관으로 사람의 존재를 심판하면 마냥 죄인일 뿐 아니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피하려 한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 사람의 정체성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고, 그렇게 죄인이 될 때, 자기가 가진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순종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인정할 때(죄를 시인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살았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시고 용납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런 연약함, 세상적인 가치고 패배자가 또 죄인이 되는 그 모습을 인정할 때 비로소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는데 자비나 사랑이 있겠는가? 이겨야 하고, 자기의 주장을 펼쳐야 선한 사람이 되는 세계에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자기의 의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세계는 언제나 희생이 따른다는 놀랍게 채색된 논리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심지어 가정에 까지 사회와 세상 전반의 기초가 되어 있다. 희생하고 섬기는 것은 이기고 나서, 피라미드 꼭대기에 가서 노블리스 오블리제 같은 헛소리나 베풀고 동냥하듯이, 자기가 이긴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의 일부로서 노릇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일은 그것이 아니다.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다는 것, 거듭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성령의 역사(잉태하심)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연약한 인생으로 서로 사랑하며 사는 중에 하나님의 성품이,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임이 나타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인생이 알도록 하신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을 믿는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형식이요 성전이며,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와 의와 뜻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의가 육신 가진 자기 삶과 하나가 되는, 즉 하나님과 하나가 된 아들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일이라도 믿으라(자기 것으로 순종하라)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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