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다. 그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어떤 것일까? 그 이유를 생각하기에 앞서 ‘과연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누가 유익인가? 예수님? 아님 믿는 사람? 둘 다?’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보고서 답을 하면 좋을 것 같다. 과연 어떤 이유에서, 또 누구에게 유익이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을까? (까칠한 질문을 덧붙인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데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또 뭘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생각한다. 간혹 고상한 믿음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유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가지신 분이기에 사람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정말일까?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구하면’이라고 하신 것을 생각하는 것도 사람이 희망하는 것, 자기가 원하는 것,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 간절한 것을 구할 때에 마지막에 인장처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을 주문 외우듯 말을 하면 예수님께서 들어주시는 신호로 여기신다는 식의 자의적인 해석이 고착화 되어 있다. 심지어 한국 사회에서는 기도 끝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배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이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 ‘예수’라는 고유 명사를 기도할 때 꼭 언급하라는 의미가 본래의 뜻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사람 속에서 늘 누리듯 알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전화기는 전화를 하는데 쓰기 때문에 전화기고, 자동차는 자체 동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자동차다. 특히 유대인들의 경우 아기가 태어나면 바로 이름을 짓지 않고 살면서 그 사람을 대변할 수 있는 이름을 붙인다. 그 전에는 대부분 ‘누구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바+아버지의 이름의 형태로. 이와 같이 이름은 그 존재의 정체성이다. 그 이름을 들으면 그 존재가 생각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름이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서 기도하면 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갑자기 하신 말씀이 아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도 같은 말씀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역시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또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그것을 사람이 구하라는 것이다.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인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을 구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까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것을 사람이 구하는데 주시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구하면 주신다고 하시고, 이름 곧 그 정체성을 구하라고 하신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의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름이란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의 정체성을 전하러 오셨다는 것, 그 하나만 확실히 알아도 예수님께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이 전하신 사람이 회복해야할 그 정체성,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다른 정체성을 가지려 하거나, 예수님의 정체성과 다르게 예수님을 대하면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십계명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신 계명이 있다.(제 3계명) 이 계명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대함에 있어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게 대하라는 말씀이다. 남자에게 비키니 수영복을 선물한다면 그것은 그 비키니의 품질이나 가치와는 무관하게 그 남자를 망령되이 하는 것이다. 존재의 정체성과 다르게 대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존재의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 그러면 주신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을 구하라는 것이고, 그럴 때에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인데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와 다르게 예수님께 소유와 공로에 관한 것을 구하고,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삶의 모양과 육신의 삶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아무리 그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언급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과 예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망령되게 모독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다. 오신 이유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오신 것이니 사람에게 주시려는 것 역시 그것이다. 그 전하고자 하신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영이신 하나님이 그 성품을 형이하학적인 세계, 실존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시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 자리, 하나님의 성품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이고,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된 자리며,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필요,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서 지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 관점, 이 법을 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유익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섭리에 사람이 참여했다는 것, 아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시는 것에 택하셨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은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택정함을 받은 은혜인 것이다.


생명도 없는 그냥 흙에 불과한 인생,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씨가 심기듯 사람 안에서 이 육신으로 살 동안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살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은혜고, 그것이 감사한 삶을 사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은혜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일이 사람에게 영광이 되는 법인 것이다. 이 법을 모르면 감사도 다 헛것이다.


육신의 일은 육신으로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대로 살면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인 것이다. 육신의 일,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일은 다 육신의 수고로 하면 된다. 그러라고 육신을 주신 것이지, 병원에 가면 될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된다고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일을 기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공중의 새를 굶기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것이다. 육신이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돕지 않으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동차를 목적대로 이동하는데 사용하는 운전자가 기름을 넣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생명을 가진 삶을 사는 것, 그것 하나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맞는 기도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정체성을 사람이 회복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이유이며 그것이 이루어진 삶이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 영광스런 삶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