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1~3) 근심하지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4. 27. 12:02 Writer : 김홍덕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유명한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이 무엇인지 잘 이야기 하지 않는다. 거저 세상에서 걱정하는 일들, 육신이 먹고 사는 것에 관한 일들이 어떻게 될지 염려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잘 해 주실 것이라’는 위로의 말로서, 또는 신념을 돋우는 말씀으로서 이 말씀을 믿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이제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이르자, 제자들이 가진 두려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가진 두려움은 단순하게 자신들이 따르는 주님이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시니 그 공백으로 인하여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 두려움은 자신들이 믿었던 예수님과 아버지께로 갈 것이라고 하시는 예수님이 다르기 때문에 가지게 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과정에서 어쩌면 이 두려움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할지 모른다. 자신들의 생각과 가치로 예수님을 믿던 안목과 생각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하나님의 뜻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겪는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은 시험을 쳐놓고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것과는 세계가 다른 두려움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정체성이 이 땅에서 자기 육신이 살 동안 겪게 되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임을 믿는 것에 기반을 둔 사람은 이 두려움이 뭔지 모른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이 말씀이 해당되는 삶의 여정이 없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실 것인데, ‘지금은 너희가 내 가는 곳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모든 신앙인은 적어도 한번은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님과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 정말로 같은 예수님인가 근심해봐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망 가운데서 난 범죄 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했듯,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있고, 그렇게 자신이 생각한 하나님(우상)의 틀 안에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닐 것 같지만 이것은 명백한 일이다. 사람들은 육신을 가졌기에 육신으로 모든 것을 먼저 인식한다. 그리고 그 인식은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님을 알기 전(모든 사람이 이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까지는 누구나 그것이 세상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눈에 보이는 세상이 하나님을 믿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교회는 또 그것을 가르치고 설교한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그런 가치관으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근심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제 서야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본질이 아니지 않을까 눈치를 채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근심은 바로 그 근심이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과 아버지께로 간다고, 너희는 지금은 올 수 없는 자리로 간다고 말씀하는 예수님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채고서 빠져든 근심, 그 근심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음과 같이 나를 믿으라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기대와 신념일 뿐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라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이제 너희의 생각대로 나를 믿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이는 것이 너희가 나를 믿는 믿음으로 삼아라.’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말씀이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이어서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누구라도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들이 거하는 곳이 바로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처소가 집이나 방과 같은 물리적, 지리적 장소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들이 거하는 처소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 아들이 많다는 것이다. 아들이 많이 거할 수 있다는 말씀이고, 이것은 다시 말해서 아들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즉 이 처소는 <정체성>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에 관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처소는 장소가 아니가 정체성을 말씀하시는 것!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다음에 하늘나라에 들러서 하나님 아버지께 집을 확장하시라고 한 다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처럼 생각한다.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처소를 장소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처소를 장소로 생각하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곳은 다름이 아니라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깨달은 깨달음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게 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 자기 정체성이 되는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늘어난다는 것, 또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집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십자가를 지기 전)은 아니지만 이후(십자가를 지신 후)에는 너희가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믿는 대상의 모든 뜻과 의와 행동의 결과를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믿는 대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이다. 아버지의 모든 뜻이 육신이 된 존재가 아들이 아닌가? 아들은 숨만 쉬어도 아버지의 DNA가 나타나는 존재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아들의 정체성이 제자들과 또 오늘 우리의 정체성으로 믿으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떼쓰지 말고.


그렇게 될 때, 즉 아들의 정체성이 자기 정체성이 되면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니 그러면 아버지의 집에 거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 집에 거하지 않으면 어디에 거하겠는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정체성으로 처소를 설명하신 것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집에 자리가 있다. 집에 아무리 손님이 많아도 아들이 거할 자리는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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