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소를 마련하러 가시겠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이 제자들과 오늘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근심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자신들은 가기 힘들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뭔지는 모르지만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있는 주님은 갈 수 있지만 자신들은 갈 수 없는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그것을 느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보는 안목이 증명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정치적인 왕이 되어서 오천 명을 먹이시던 능력으로 로마의 속국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각양의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눈에 보이는 존재로만 보고 있다 보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처소>도 몸이 거할 곳으로 생각했고, 그러다보니 자신들은 예수님과는 눈에 보이는 능력의 차이가 있으니 ‘갈 수 있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련하시겠다고 하신 처소는 몸이 거할 곳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둘 수 있는 자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둘 수 있는 정체성, 곧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인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둘 수 있는 자리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 처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설명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자들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제자들의 부족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아직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서’라고 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나면’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사람이 거할 자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면 제자들(사람들)이 거할 처소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제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도마는 물었다.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겠나이다.”라고. 이에 예수님께서 정말로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바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다. 이 말씀은 너무 유명해서 누구나 아는 것 같지만, 제자들과 같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눈에 보이는 길과 물리적인 빛 그리고 생물학적인 생명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과 빛 그리고 생명이 무엇인가? 차가 달리는 길이 길이고, 전구에 들어오는 빛과 햇빛이 빛인가? 그리고 생명이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해지면 ‘앞이 캄캄하다.’, 혹은 ‘길이 안 보인다.’와 같은 말들을 한다. 또 어떤 기능을 이용하려고 구매하거나 만든 물건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맛이 갔다(죽었다)’라고 말들을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길과 빛과 생명은 바로 그것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어디로 가져가야할지 모르기에 길이 필요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빛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때로 사람들이 말하듯, 살아 있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이 자기 존재의 이유, 삶의 목적과 의미가 없는 죽은 것과 같은 삶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회복한 생명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모든 것을 보여주시는 분이시기에 길이고 빛이며 생명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과 빛과 생명은 모든 인생이 거해야할 자리(처소)인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아는 자리에서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바로 인식하는 빛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삶이 바로 생명이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람이 가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 삶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사람을 지으신 이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지었다는 것은 사람에게 어떤 목적과 의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사람, 즉 창조주로서 가진 의와 뜻을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하셨기에 그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나타내면서 사는 사람이 바로 아들이기에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가지신 이가 바로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버지께로 가면 처소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알면 사람이 자기 정체성의 자리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죄라는 것이 자기 자리(정체성)을 떠난 것이 죄이니, 자기 자리를 회복하면 구원인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자리니 아들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유도 그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즉 하나님의 뜻과 계획(LOGOS:말씀)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셨다는 것이다.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가 삶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된 예수님의 모습, 그것이 바로 사람의 자리 곧 정체성이며, 사람이 살아야 할 길이고, 인생의 모든 것을 밝히는 빛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다고 하시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바로 보여주신 자리가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는 것은 처소를 마련하러 가시는 것이다. 사람이 거할 자리가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하나님의 뜻이 생명인 곳 바로 아버지의 집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제자들과 같이 근심할 것이고, 또 예수님이 마련하는 처소가 천국의 부동산 하나 자리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에서 잘 살려면 헌금하라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우리의 처소는 인간의 자리이다. 인간이 창조 목적대로 있을 때 자기 자리에 있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자리다. 십자가는 죄지은 사람과 벌 받는 사람 다른 대속이 아니다. 사람의 정체성,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길이고 빛이고 생명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을 때, 길을 알고 빛 가운데서 밝으며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십자가는 수고의 공로가 아니다. 소유를 드림도 아니다. 십자가는 사람이란 공로와 소유의 법으로 보면 죄인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자리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 ‘율법도 지키지 않는 저런 꼴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며 죽인 것이나, 교회에 헌금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해야 천국에 가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산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길과 빛과 생명이신 것은 사람들이 존재의 하나님을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섬기는 하나님과 사람인 자신의 정체성이 이반된 죄와 수고 가운데서 있다 보니 방황하고 어둡고 사망 가운데서 길과 빛과 생명이 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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