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31-35) 새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4. 20. 10:4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유대인들과 많은 갈등이 있었는데, 그 갈등의 핵심을 <계명에 대한 갈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율법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주를 이루었다. 안식일에 대한 것도 그렇고, 사람이 죄를 사한다는 것에 관한 것이 그랬고, 또 수많은 것이 그랬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계명은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아로 비쳤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다. 또한 안식일에 대하여도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들은 유대인들에게 단순한 자극을 넘어서 그들이 목숨을 걸고 그 일에, 그 말에 대항하고자 하는 전투력을 극대화하는 도전적인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자충수(?)가 되었다. 그 일들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되셨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과의 갈등의 끝자락에 서 계셨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마당에 제자들에게 계명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계명, 율법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유대인들과 갈등을 겪다 패배해서 십자가를 지러 가는 순간을 맞았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새 계명>을 주신다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사랑>이었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세상에 널렸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정확한 개념이 흐려져 있다는 의미이다. 이 블로그에서는 사랑을 <의미>라고 말했다. ‘서로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는 것’이 사랑이고, 상대에게 존재의 의미를 일깨우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에게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모습들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 사도가 열거했다. ‘천사의 말을 하고’로 시작해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을 말했다. 그런 행동들은 세상 사람들이 숭고한 사랑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런 모든 행동들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부여하신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랑은 그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다. 연인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반이 나와 다른 이성을 가진 존재인데 그 중에 한 사람만이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이기에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사람의 존재 이유가 되시기 때문이고, 사람이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사랑도 당연히 이것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다른 사랑을 전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니 당연히 그 말씀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즉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전하고자 하신 말씀이고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이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모든 것이 사람이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목적과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하나님과 의미 있는 관계가 회복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도, 십자가를 지시는 것도 다 그것 때문이고, 그 자체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사람 만드신 뜻과 목적을 사람에게 전하므로 사람이 그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을 모르면 제 아무리 대단한 희생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 사랑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새 계명이고,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의 모든 규범을 지키는 행동, 계명을 준수하는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율법이든 계명이든 또한 그것을 지키는 어떤 행동이나 모습이라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의미를 모른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제 아무리 바다에 몸을 던져도 효도하는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심청전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나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 삶의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좋은 것이고, 그렇게 남들이 하지 못하는 어떤 섬김을 하는 행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기 때문에 군복을 입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발을 씻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먼저라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에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행동을 자꾸 하다보면 그런 사람이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이 바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점이다. 율법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경말씀을 지켜 행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같은 생각이라는 것은 모른 체.


생명의 세계라는 것,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가 실패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인 것은 성경이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 생명이 있는 자는 그냥 살기만 하면 성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생명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이 없는 말씀과 교회의 설교는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고, 생명이 있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깨달으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방향이 반대인 것이다.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행하고, 생명이 없는 말씀은 밖에서 안으로 변화가 될 것이라고 속이는 것이다.


실제로 세상의 모든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자라고, 생명이 없는 가공품, 제조된 것들은 밖에서 안으로 만든다. 자라지도 않는다. 더 크게 되려면 새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생명은 자기 정체성에 맞는 것만 먹으면 안에서 밖으로 점점 커지고 자란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자는 그렇게 생명이 자라는 것이다. 말씀을 지켜서 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 생명의 본질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것이 새 계명이라는 것이다. 사랑이 새 계명인 것은 이전에 없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을 사랑하셨으니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새 계명인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 사랑 때문에 생긴 것이며, 이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하나 없는 이 하나님의 사랑, 율법과 계명은 넘쳐나지만 그 존재의 핵심인 이유와 본질이 바로 사랑이기에 이것을 보이시려고 섬김의 길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원래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시려 함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고 그러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세상이 알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존재의 의미를 알려주는 존재가 되라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전하고자 하신 뜻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회복한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 것이고, 그렇게 사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같이 서로 섬기는 것이 될 것이고, 그런 모습을 보는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듯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당연히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랑은 밥 퍼주는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생명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사랑이 계명인 것은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모든 계명의 이유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사람이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 사랑이 있으면 그렇게 신념으로 지키려 하는 모든 계명들의 삶이 자연스럽게 살아질 것이기에 계명이다. 지키려는 계명이 아니라, 무심한 척 사는데도 계명이 그냥 지켜지는 삶, 그것이 바로 새 계명, 바로 사랑하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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