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발을 씻기실 때에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라고 하셨다. 자신을 팔아버릴 가룟 유다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이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제자 중의 한명이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신다. 좀 이상한 것이 있다면 ‘(떡)한 조각을 떼서 주는 사람’이라고 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떡을 떼어 주시고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까지 하셨는데도 다른 제자들이 누가 예수님을 파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직접적인 표현으로 말씀을 하시는데도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자라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만찬 자리를 떠났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배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이라 생각이 된다. ‘혹시 내가 예수님을 배신할 사람인가?’라는 염려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은 다른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자신이 그 사람이 아닐까 염려했을까? 그것은 지금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자기들이 기대했던 예수님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일이 있은 후에> 내가 그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부터 이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3:19)


제자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길은 달랐다. 적어도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께서 제자들의 마음에 임하실 때까지는 그 괴리의 여운이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엠마오로 떠났던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는 우리 아들들을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하던 시점에 표면화된 예수님의 길과 다른 제자들의 기대는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잘라 버리는 것에서도 나타났었다.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가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보다 여종에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을 베드로의 비겁함으로 알지만, 사실 베드로는 성경 전반을 통해서 볼 때 자기 목숨을 구걸하려고 비겁하게 구는 그런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인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하는 열심당원으로서 품속에 칼을 품고 다닌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레지스탕스와 같은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베드로가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스승을 부인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때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예수와 너무나 다른 모습의 예수님의 모습, 채찍에 맞고 있는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었기에 모른다고 했고, 자신이 그렇게 목숨을 바쳐 따라다니며 주님으로 고백한 분의 일을 알지 못하는 자신이 용서되지 않아서 울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베드로의 배신은 유다의 배신과는 전혀 다른 배신이었고, 단 하나의 열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용맹함으로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오순절 이전까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께서 제자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하실 때에 모두들 자기가 예수님을 팔 사람이 아닌가? 근심했던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꼭 집어 이야기 하는데도 알아들을 정신이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세배데의 아내의 기대와 같고, 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마음을 품속에 감추고 다닌 베드로의 기대와 같은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유대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국에서 해방시키고, 백성들이 처한 가난과 병에서 해방시키실 주님으로 오심을 믿었던 그 기대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호로 맞이한 유대인들의 마음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한 하나님의 뜻과 다른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오늘도 넘쳐나다 못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모습이 되어있다.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세상에서 성공을 기도한다. 하나님이 또 예수님이 도우실 때 이 세상에서 하는 일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보다 더 훌륭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설교하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 믿음을 위하여 새벽에도 기도하고 밤 새워 기도한다. 그게 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좀 더 고상한 신앙이라 자부하는 신앙들은 얼마나 마음이 갸륵한지 자신과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일을 그렇게도 걱정한다. 동성애가 세상을 망칠 것이라 걱정하고 이슬람이 세상을 망칠 것이라 걱정한다. 마귀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지 모르니 하나님께서 나서 주셔야겠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이 나서겠다고 각오한다. 정작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들 앞에 놓인 쓰레기봉투 버리는 것은 하지 않고, 또 자기가 잘났다며 떠드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못하면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나님의 경영이 위태하게 되었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다 제자들의 기대와 같은 것이다. 아니 실은 제자들의 기대보다 못한 것이다. 그런 것은 바리새인들의 안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심과 세상을 사랑하심을 온전히 믿는다면 이 세상이 잘못될 것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신이며 존재의 신이라는 것을 믿을 찐데 하나님 앞에 자기 육신의 공로와 소유에 대한 믿음이나 신앙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 그런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누가 가룟 유다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들 가룟 유다가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북한에서도 가룟 유다를 배신의 아이콘으로 이야기하는 정도라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들 가룟 유다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무엇보다 자신은 배신하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자기 기대와 약속과 신뢰를 저버린 사람을 가룟 유다라고 칭하는데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렇게 알고 있는 가룟 유다, 그 가룟 유다가 가룟 유다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하여 제자를 선택하셨는데 어쩌다가 잘못 뽑은 한 명,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다?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내용일까? 하나님의 아들도 제자를 뽑는 일만큼은 제대로 못했다거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기 위하여 작전상 제자 중의 한명에게 사탄의 마음을 심어서 그 뜻을 완수하셨다? 와 같은 것이 가룟 유다의 일의 본질일까? 그러니까 그것이 가룟 유다의 본 모습이고, 가룟 유다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의 본 내용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룟 유다에 대한 모든 것이 틀리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이 그것이 다가 아니라면 가룟 유다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것, 그것은 비단 가룟 유다만의 일이 아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도 같은 배신을 했다. 자기 맘대로 예수님을 규정하고선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 예수님을 팔기도 하고 떠나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이와 같은 마음들이 다 있다는 것이다. 모두들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 육신의 삶에 대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신 주님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기대, 자기 맘대로 예수님과 하나님을 규정한 마음과 예수님의 정체가 다르다는 것이 나타날 때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한낱 노비의 몸값으로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자신이 기대했던 예수님과 다른 모습의 예수님이 왜 그 모습인지 알려고 한 차이가 결정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신으로 기대하고 믿었던 예수님이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거나 기대하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으로 더 알려고 하고, 계집종이 예수와 한패가 아니냐고 할 때, 정말로 솔직하게 ‘저렇게 매 맞고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는 정녕 내가 모르노라’ 대답하는 고백, 곧 죄(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죄)를 고백할 수 있어야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온전한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 기대했듯, 예수님이 시험을 잘 치게 해 주고, 부자 만들어 주는 세상의 성공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그런 것이 기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정확히는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님을 알았을 때) 어떤 이들은 예수를 버리고, 한낱 종의 가치로 팔아버리고, 어떤 이는 ‘왜 내가 아는 예수와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다른가?’를 알고자 하는 돌이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당시 종의 몸값인 은 30에 팔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결해주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 예수님을 팔아 버리는 것이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돈 가지고 오고, 세상의 성공을 가져오는 램프의 요정처럼, 도깨비 방망이처럼 여기는 안목, 그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가룟 유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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