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은 30, 곧 당시 종의 몸값에 팔아 버린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서 자신을 팔 자를 가리키는 빵을 주시자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곧 밤이 되었다고 했다.(요 13:31) 예수님을 판다는 것은 영혼의 밤을 맞는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을 종과 같이 팔아 버리는 사람들, 예수님을 자기 삶의 곤고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로 만들어 버린 모든 가룟 유다와 같은 신앙인들의 심령은 다 어두움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한 자리에서 가룟 유다가 나가고 나니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었다고 하셨다.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요 13:31)

가룟 유다가 나갔다는 것, 그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예수님을 종과 같이 여기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아마 자신이 예수님을 종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 유익인가? 아니면 사람에게 유익인가?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다면 하나님이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단지 자기가 도운 사람이 세상에서 자기가 만든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서, 그렇게 더 나은 삶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심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형상(이미지)을 나타내시려고 하셨다. 그렇게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철저히 하나님의 목적이 사람에게서 이루어지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며, 하나님이 유익이 되시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역시나 하나님이 만든 다른 사람보다 육신이 더 잘사는 것을 도와주시려고, 아니 그런 하나님임을 믿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주 예를 들 듯이, 차를 사는 어떤 사람도 차를 세차하고, 광내고 기름 넣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사지 않는다. 그것이 그럴 찐데,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차를 씻고 닦듯이 먹을 것, 입을 것 대령하시려고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가 육신으로 이 땅에 살 동안에 남들보다 더 좋은 것, 더 편한 것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도무지 성경 어디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 하나님께 “밥 주세요, 돈 주세요, 좋은 여자 주세요, 좋은 직장 주세요. 그래야 제가 하나님의 교회에 더 헌금 많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 곳에 기부할 수 있고, 좋은 직장으로 시간이 많으면 교회에 가서 청소라도 더 할 수 있자나요?”라며 자기 육신의 것을 구하는 그 믿음, 그것을 구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을 자기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종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룟 유다가 종의 값 은 30에 예수님을 판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앙은 다 가룟 유다의 신앙이고, 그 신앙은 바로 어두움의 신앙인 것이다. 즉 천지창조가 이루어지기 전 흑암이 혼돈하는 세계에 머물고 있는 그런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 그렇게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것이고, 예수님을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램프 요정으로, 종으로 여기는 신앙이 자기 안에서 나가고 나면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고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 땅에서 다름 사람과 경쟁에서 이긴 것을 영광으로 아는 세상의 법으로 이겨서 그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마음이 사람에게서 떠나고 났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든 목적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천지창조의 아침을 맞았다는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그릇과 성전으로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데 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영광을 얻는 것이다. 영광을 얻으신 하나님과 하나가 된 존재가 영광을 얻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세상의 법으로 경쟁해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서서, ‘내가 여기에 이른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이나, 전 재산을 교회에 드린 사람을 보고 ‘와! 대단하다. 하나님께서 이 일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라며 칭찬하는 목사들의 가증한 말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히려, 세상의 법으로 이겨서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르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가치관으로 볼 때 너무 볼품없는 목수의 아들이 겁도 없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죽여 버린 그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즉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신앙과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인간의 본성, 그것이 자기 운명이요 정체성임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의 본 모습, 세상의 경쟁에서 이긴 것을 영광으로 아는 사람들의 안목으로 볼 때는 부끄럽고 극복해야할 인간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요 존재의 목적이며 그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그 연약한 사람의 모습(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기에 너무 좋은 그런 존재인 사람의 본 모습)을 자기의 존재 목적으로 삼는 것에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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