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라고도 한다. 그의 성격은 급하고 또 정의를 위하여 목숨도 버릴 기세로 앞장서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베드로가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상한 낌새를 차리고는 어디로 가시는지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요 13:36)

라고 대답하셨다.


그런 예수님의 대답에 가만히 있을 베드로는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목숨도 버리고 가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오늘 밤 새벽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답을 하셨다.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금>의 상태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갈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베드로의 마음으로는 당장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도 버릴 수 있을 것 같고, 실제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의 귀를 칼로 자르기도 했다. 그것은 지금으로 보면 뭐 공무 집행방해 정도는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용기는 있었다. 그러나 그 용기로도, 또 각오로도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자기 자리, 자기 능력이 안 되는데 하겠다고 하니 당연히 부인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을 위하여 죽겠다는 사람들은 많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 같은 각오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다고 다 예수님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념을 가진 좋은 신앙을 괜히 삐닥하게 보는 것 같지만 신앙은 신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순종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보다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한번 수용하는 것 더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알 것이고, 그렇다면 신념으로 예수님께 갈 수 없다는 것도 알 것이다.


베드로는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이 심문 받는 뜰까지 따라 갔다. 그리고는 먼발치에서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는 것을 보다가 옆에 있는 여종이 ‘너도 저 사람과 한 패가(제자가) 아니냐?’는 말에 ‘아니라’고 세 번 부인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다. 베드로의 부인은 어쩌면 여종과의 대화 그대로 솔직했다. 베드로에게 있어 매 맞는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매 맞는 예수님과 자신이 한 패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한 예수님과 매 맞는 예수님은 다른 분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꾸 예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신다. 사람들의 가진 신앙의 상당한 부분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도 내어 놓겠다고 장담하는 신념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방향성이 같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하겠다는 방향성.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나님께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고 자신을 보내시면 가겠다고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은 대단한 신앙인 것 같지만 방향이 잘못되었다.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잘못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잘못 경영하고 있는 세상인데 내가 가면, 나를 보내주면 그것이 바로 잡힐 것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능력이 있다는 의미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은 베드로의 믿음이나 신념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자리는 신념이나 의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이다. 사람이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일이지!”라고 생각하는 일이ㅣ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아닌가 싶겠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다. 방향이 반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다들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있고, ‘하나님의 일이란 이런 것’이라는 정의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결론까지 가지고 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죽으면 안 되는 분이라는 결론이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게 하나님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자기 육신을 순종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이고 사람이고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하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세상을 바꾸는 것도, 또 믿는 사람이 육신으로 살 동안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한 가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다른 점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성공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이 땅에서 남들 보다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역시 믿음의 실체가 아니다. 단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가시는 자리에 지금 가지 못하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기대하는 것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위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독립시키고 왕이 되어 가난과 병마들을 다 이겨낼 메시아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베드로는 갈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런 기대를 가졌기에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그런 그의 모든 기대도 다 없어지기에 예수님은 자기가 목숨을 바쳐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 한 예로 목사들이 토요일 결혼 예식 주례를 기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주일날 설교 준비에 지장을 준다는 것 때문이다. 그런 발상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말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러진 않을 것이다. 예배 의식과 목사라는 사람, 또는 말씀 전하는 사람이 다치거나 피곤해지면 말씀이 위태롭게 된다는 생각, 심지어 그런 생각을 셀프 공천처럼 스스로 하는 이상한 목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다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말리는 것이다. 말씀과 계시에 더 밝은 사람이 희생당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복음이 전해졌고, 게시와 말씀이 더 밝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종과 같이 섬기는 그 십자가의 섬김 없이는 복음이 전해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인데, 다들 밀알을 지키려고만 하는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예수님이 가신 자리인 십자가는 복음이 죽어야 복음이 전해지는 세계다. 목사를 보호해야 교회가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발을 씻기는 섬김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면 믿음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예를 사형수란 멍에와 바꾼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러면 안 된다. 이것은 교묘하지만 정말로 안타깝고 답답한 것이다.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가지 못하는 이유를 잘 알아야 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핍박하거나 저주해서가 아니다. 베드로는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을 믿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마치 지금 교회를 위해서 목사는 좀 더 좋은 차를 타고, 상석에 앉고,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좋은 설교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세상의 방법으로 시험쳐서 된 목사가 어떻게 하나님의 종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 가려면, 예수님의 길을 가려면,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한 알의 밀알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사보다 왜 순종이 나은지,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왜 책망을 받았는지, 예수님을 위하여 죽겠다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가지 못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고 도무지 어디로 신앙이 갈 것인가? 예수님이 가신 곳으로 가지도 못하는 신앙과 신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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