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7-9) 아버지를 본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4. 29. 11:3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고 난 다음에 이어서 하신 말씀은 “그러니 나를 따라 오너라”와 같이 길이나 진리나 생명에 대하여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것은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사람들이 갈 수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길이고 진리며 생명이신 근거와 목적은 오직 사람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가는 것을 위함이라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하는 육신의 일의 기로에서 결정을 할 때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라는 측면에서 예수님이 길이라고 하심을 의지하고, ‘무엇이 사실인가?’하는 것을 진리로 착각하고, 죽고 난 다음에 영원히 사는 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한다.(생각하게 된 동기는 다른 게 아니다, 이 말씀의 본질을 그렇게 육신의 문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는 목사들(세상의 방법대로 시험치고 이력서 내서 시무하는)이 그렇게 설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아버지를 만난다는 것이고, 그 만남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가진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므로 이는 하나님의 뜻이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빌립은 그러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인데 어째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였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이 예수님의 말씀은 앞에서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신 것처럼, 아버지께로 가려면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빌립과 제자들은 예수님과 오래 있어 예수님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아버지께 온 자들이건만 왜 그것을 모르느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아는 것이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안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려고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말씀 하나에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다는 생각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시험에 합격한 것이나 취직이 되는 것과 같은 것, 그리고 조금 고상하게 선교하는 것과 같은 것들. 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님을 만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그 형상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 없다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닌 것이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선교나 복음이 전파되는 것도 맹점이 있다. 사람이 교회에 나온다고 전도고, 외국에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 사람이 모인다고 복음이 전해진 것이 아니다. 복음은 결국 사람에게 복된 소식이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같이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이 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람의 삶을 볼 때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과 이미지를 알 수 있게 되어 자신도 그런 삶이 되는 것이 전도고 선교지 몸이 교회에 나온다고 전도가 아니다. 더욱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사람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의 일이 잘되게 해 달라고 믿는 믿음을 가진 정도로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시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신앙인은 별로 없다. 누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물론 객관적인 믿음이지만)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셨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이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전하고 말씀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은 부정하게 여기는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을 형식으로 표현해줄 존재로 여기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고 율법을 지키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거나, 돈이 있어야 사람답다거나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나은 위치에 있어야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보기 좋다거나 하는 사람 + 어떤 것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시는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서 이 육신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고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지으신 것임이 자기 삶의 목적이고 존재의 이유로 받아들인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삶으로 표현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육신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성경을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지켜서 행하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온전하기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수고와 공로와 소유의 드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가 정확하게 인식이 된다면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주님으로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존재론적으로 만나졌다면 “하나님 당신은 나의 존재 이유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가 되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믿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육신을 가진 자기 삶이 부정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죄인 같고 연약하고 부정해 보이는 이 육신, 세상의 가치고 십자가에 못 박으면 발가벗겨져서 못 박히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그 육신이 바로 자기 운명이고 하나님이 조성하신 자기 존재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간 자고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사람의 처소, 곧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둘 자리라는 것을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자리로 가는 길도 예수님이고, 사람이라는 존재 정체성의 진리도 예수님이며,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정체성에 거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지으신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자로 여기기에 예수님이 생명이신 것이다. 이러한 법이 아닌데 예수님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아는 것은 다 도적질과 같은 것이다. 즉 육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길)이 예수님께 있다고 하거나, 예수님이 모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진리라고 하거나, 예수 믿어야 죽어서 영생한다는 식으로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다고 뇌까리고 부르짖는 것은 예수님도 모르고 하나님께 가지도 못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부정하게 여기면 필연적으로 사람에게 어떤 것을 더하고 요구하게 된다. 아니면 영지주의처럼 육신을 포기한다. 그러다보니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해야 한다.’가 생겨서 법이 되고 교리가 되고 사람을 압박하는 것이다. 술 마시면 안 된다. 십일조 해야 한다와 같이 have to와 must가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사람의 부정함을 극복하는 목적과 이유와 목표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는 것은 신앙의 맹점을 지나 허무한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 사람은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다. 세상의 가치, 종교적인 가치로 볼 때 부정하고 연약한 이 육신을 가진 삶은 하나님께서 그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 적합해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이라는 것이 자기 운명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겠는가? 또한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겠는가? 그 마음으로 사는데 어떻게 성경이 지켜지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 자람이요 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만난 것임을 아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로 온 사람이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된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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