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유명하고 벅찬 말씀이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한편 막막한 말씀이기도 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하신 일=기적>이라는 기초 위에서 생각을 하면 이 말씀은 절대 이룰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죽은 자를 살리고 그 자신이 무덤에서 육신이 부활한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으니, 그보다 더 큰 일을 <예수님의 일=기적, 혹은 평범한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 일>이라는 공식 위에서 예수님보다 큰일을 한 사람은 이때까지도 없었고, 앞으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일은 보통 생각하듯,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일은 우리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길을 따라 오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인데, 만드신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조차 모르거나, 미완으로 만들어 놓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정보를 넣어야 뭔가를 더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일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일은 앞의 글에서 포스팅한 것과 같이 <십자가>다. 육신을 가진 우리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보이신 곳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이시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의 자리로 사람들을 이끄시려는 일을 하시기에 하나님이 하시면 예수님도 일을 하시는 것이고,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자기 자리로 가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 또 전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믿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 육신의 일이 잘 된다고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일을 듣고 읽을 때에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아들도 유대인의 왕도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죄인이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나의 모습 역시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보면 예수님과 동일하게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믿으면 사람은 달라진다. 누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법을 좇아서 살겠는가? 그러니까 세상에서 경쟁(심지어 신앙마저)하고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야 선한 사람, 이긴 사람이 되는 그 법으로 자신이 죄인이 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다시 그 법을 좇아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럴 리는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세상의 법과 같이 이겨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갈 때 선한 사람이 되고, 이 육신은 그런 법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졌기에 이 육신 가진 삶이 그렇게 연약하고 부정해 보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해낼 형상이요 아들로 삼으심을 아는 사람의 삶이란 진정으로 남을 섬기는, 아닐 그럴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 때에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삶을 보고서 ‘저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고,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그 사람도 자기가 본 사람 곧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는 생명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일한 생명이 되는 것이 복음이 전해지는 생명의 법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일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일>인 것이다.


그 예수님의 일이야 말로 진정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고,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 양을 먹이는 일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일과 더 큰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이 우리에게 유익인 것이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신 일을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보다 큰 일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보다 큰일을 하게 되는 조건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한다는 것 까지는 이해가 된다고 쳐도 어떤 것이 더 큰일일까? 그것은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이지만, 우리는 그 자리가 아닌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예수님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원래부터 흠이 없으신 분이라고 했다. 그것은 예수님은 원래부터 세상의 가치관이 예수님의 가치관이었던 적이 없었던 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가치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애굽과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자로서 살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돌이킴으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정체성, 사람으로서 어떻게 보면 패자가 되는 그 정체성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는 자들이기에 예수님보다 큰일을 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 짐은 정말로 쉽고 가벼운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면서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가려 하고, 하나님의 주신 육신의 삶은 부정하고 연약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며 흙에 짚을 더하고 불에 굽듯이 자신을 단련시켜야만 하늘에 이를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나고 배워서 자기의 의로 살고 있는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그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이대로가 온전한 것임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예수 믿기 어려운 유일한 이유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이것을 알고서 예수님이 보이신 그 운명대로 살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부부가 같이 살지만 남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자가 알 수 없고, 여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남자가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세상에 다들 섞여서 같이 어울려서 어떤 이들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려고 악을 쓰고 살고 또 그러지 못해 분해하고, 반대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삶이 정말로 온전한 것임을 알아 감사하고, 섬기며 남을 이겨야 하는 이유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 이 삶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려고 심지어 신앙도 그렇게 이기려 하는 사람들로서는 이 십자가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일이고, 또 더 큰일을 하게 되는 생명을 가진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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