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며, 우리 인생들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육신이 사람이기만 하면 다 성령이 오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을 알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알려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 즉 십자가를 지시는 것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내용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자신과 연관이 있는 사람, 즉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인 것이다.


바로 그 사람들, 그러니까 십자가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자신과 상관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너희>이다. 이 너희는 요15장에서 분명하게 한정하신다. 즉 너희가 아무나 너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너희는 성경을 읽는 독자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가 자신의 운명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목적을 보여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이고 예수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다. 문맥으로 본다면 성령이 모든 것을 알게 한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성령이 심령 안에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평안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다고 하시는 것과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결국 같은 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은 바로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존재하는 사람과 사람의 존재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있어서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이기 때문이다.


원어적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평안은 ‘에이레네(Eirene)’이다. 이것은 ‘합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있어야 할 자리와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있어야할 것이 있어야할 자리에 있는 상태를 평안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느끼는 평안, 그리고 집에 오면 편히 쉬는 그 평안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 집, 자기 고향에 왔을 때의 그 평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과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이다.


사람들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이 가장 안정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제자리를 찾도록 늘 애쓰는 것이 사람이다. 이는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로 가야하는 운명이기에 사람의 본성 안에 그런 본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육신이 기대하는 것, 육신에 필요한 것이 풍족하고 걱정하지 않는 상태를 평안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자리(정체성)를 회복하면 삶이 평안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흔들고 옮기지 않듯,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면 흔들릴 이유가 없는 온전한 평안이기에, 돈이 풍족하다가 줄어들면 불안해지는 세상의 평안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이 평안은 존재의 평안이다. 반면에 세상이 주는 평안은 눈에 보이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평안이다. 다시 말해서 소유와 공로에 관한 평안이 세상이 주는 평안인 것이다. 정체성이 평안하다면 육신이 살아가면서 있어야 할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존재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들의 행동이 어떠해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그 관계, 그 정체성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곧 성령의 역사하심, 성령이 오시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이 가진 근심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다양한 걱정을 해도 결국은 <왜 사느냐?> 그 하나에서 모든 갈등과 근심이 있는 것이다. 돈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 돈이 잘 벌리지 않거나 부도가 나면 이상하게 사람들은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즉 사람의 모든 문제는 왜 사는지를 몰라서 일어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흑임이 혼돈하다고 했고, 예수님께서(정확히는 요한 사도)는 어둠이라고 하셨다. 세상에 빛이 왔으나 어두움이 알지 못했다고 하시는 것이 그것이다.


즉 사람이 왜 사는지가 분명하면 근심할 것이 없는 것이다. 내가 누구며, 아버지는 누구시며, 내가 어디서 왔고 왜 왔는지를 아는 사람의 인생은 근심할 것이 없는 것이다. 모든 근심은 그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근심의 뿌리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살면서 육신의 일로 근심하겠지만 그것은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근심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아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령의 역사하심이자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이 그런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로 기대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그런 것은 모르겠고 가시겠다고 하니 가지게 된 근심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과 관련된 문제로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그것이 아니라, 너희(앞에서 말한 너희)가 왜 사는지를 너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알게 하실 것이기에 근심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있어야할 것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반대로 자리를 떠난 것이 바로 죄다. 죄의 어원이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의 ‘하말티어’임)


제자들의 근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만 같던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걱정은 몰라라 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고 하니 우선은 자기들이 기대했던 ‘육신의 문제,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근심에서 무엇보다 ‘그런 것을 해결해 주시는 주님으로 예수님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니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근심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누리게 되는 평안이 있으면 다 근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들의 그 근심들은 사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났기에 하는 근심이기에 성령이 오셔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바로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을 알게 하시면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깨달아서 자기 자리를 회복하게 되니 평안한 상태가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이고 동일한 근심이며 동일한 평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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