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25-31) 여기를 떠나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5. 16. 08:34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 14장은 제자들의 근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여기를 떠나자”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여기>는 ‘근심하는 자리’일지 모른다. 아니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것이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떠나시는 일, 곧 제자들이 근심하는 그 일이 곧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하심을 알게 하시는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어나서 근심하는 자리를 떠나자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요 14:31)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을 떠나실 것인데 제자들은 따라 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고 따라가겠다는 베드로에게는 ‘나를 부인 할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을 크게 요동케 했다. 예수님과 함께 로마의 속국에서 벗어나고, 오천 명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시는 예수님이 모든 가난을 해결하실 것을 기대하며 그 놀라운 나라에 예수님과 함께 갈 계획으로 들떠 있었던 제자들에게 ‘너희는 오지 못할 곳’으로 간다고 하셨으니 그들의 근심은 심각한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도 같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우리가 이 성경을 볼 이유가 없다. 오늘 나와 상관이 없다면 성경의 어떤 말씀도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이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 제자들의 근심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근심을 해 본적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유익’ 아버지께 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신 그 ‘유익’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는 신앙이 참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 자기 귀에 들리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그날까지 자신이 가졌던 신앙, 그날까지 믿었던 예수님이 제대로 된 것이었는지 의심이 들고 근심이 든 적이 없다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유익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어느 날 지금 설명해가고 있는 요한복음 14장의 말씀과 같은 말씀을 들을 때에 그날까지 자신이 예수님께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 지와 같이 육신의 문제를 구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일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유익 곧 성령이 자기 심령에 오시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의심했고,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정체를 온전히 깨닫게 하실 것이니 근심하는 모든 것이 밝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근심하는 자리에서 떠나자고 하셨다. 십자가를 지시고 나면 하나님의 일이 온전히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기에 근심할 일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근심이 근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 알고 계시기에 근심할 필요가 없으니 나를 믿고 근심하는 자리를 떠나자고 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신다고 또 너희는 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에 근심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자기들이 알고 있던, 기대했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예수님을 그런 문제를 해결하시는 주님으로 믿고 기대했던 마음들이 근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근심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정확히는 십자가로 가시는 것이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유익이라고 하셨다. 그 유익들을 정리해 본다면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으신다.(14절)
  • 예수님보다 큰일을 하게 될 것이다.(12절)
  •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알게 할 것이다.(26절)
  • 처소가 예비 될 것이다.(2,3절)
  • 하나님께서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13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모든 유익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야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으로 가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십자가의 자리로 가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생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은 <인생의 목적>이다. 사람이 왜 사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사는지? 그것을 설명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자기 안에 땅에 씨가 심기듯 심겨진 사람에게 그 의미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이다. 

  • 그 깨달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사람의 존재 목적을 설명하는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에게서 회복된 것이다. 
  • 그것이 회복된 것을 하나님께서는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 그렇게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표현하시고자 한 뜻이 나타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렇게 성령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것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인생의 존재 목적은 사람에게 있어 근원적인 유익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용되어지는 것 만한 영광과 유익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그 어떤 위대한 일을 했더라도 자기의 존재 목적과 다르게 취급을 받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대머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드라이기가 선물된다면 그것은 모욕하는 것에 쓰이는 것일 뿐이다. 


이 모든 비밀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나면 제자들이 알고 있었던 또 기대했었던 예수님의 정체성과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의 참 정체성과의 괴리가 해소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에, 그 때가 되면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아셨기에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어 그 깨달음이 이끄는 삶은 생명의 유전자가 생명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것이고, 거룩한 것이 거룩한 것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거하실 곳에 계신 것이다. 그것이 안식이고 평안이다. 그리고 그것인 인생에서 유일한 유익이자 최고의 유익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모든 것을 이루러 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보이지 않아서 근심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자리를 떠나자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눈에 보이는 대로 보기에 근심하는 자리,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믿는 그 자리를 떠나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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