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신앙인들)은 성령이 오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흔히 체험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는 일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방언을 한다거나 암 환자가 치유된다거나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평소와 다르게 기도하는 중에 가슴이 뜨거워진다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성령이 오신 증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체험들이 성령이 오신 결정적 증거일까? 그러니까 그것이 성령이 오시는 것의 본질이고,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성령의 본분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아니다. 그런 일들은 성령의 본질적인 본분이 아니라 성령이 오시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기계로 철을 깎으면 열이 나는데 그 열이 본질이 아니라 쇠가 깎여서 어떤 모양을 갖추게 되는 것이 본질이듯이.


성령을 이야기하려면 자연스럽게 삼위일체가 거론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어떻게 한 하나님인가 하는 것을 말해야하기 때문이다. 아마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이라고 보는 입장에서 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서로 다른 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이 합쳐지면 또 다른 것이 되거나 둘이 합해진 만큼 질량이나 부피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육신이 말씀이 되었다는 말씀을 아는 것과 같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운동은 몸에 좋다.’라고 아는 것이 아니다. 꾸준히 운동하기 때문에 운동의 효과를 자기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여자가 남자를 경험하였을 때 ‘남자를 안다.’라고 말한다.(마리아) 즉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가진 자기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자기 삶으로 체휼한 사람은 삼위일체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뜻을 가지고 계시고, 그 뜻(말씀)이 자기 삶으로 나타났고, 그렇게 삶으로 살게 된 것이 성령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보여주신 것이 자기의 생명이 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라는 것은 또한 작가가 쓴 책으로 비유할 수 있다. 성부는 작가의 생각과 같다. 생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쓰고자 하는 글의 계획이요 의며 모든 것이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 작가의 생각이 표현된 책이 바로 성자와 같다. 그리고 성령은 그 책을 보고서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게 하는 감동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계획을 가지시고 그것을 육신을 가지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듣고 보게 하니 사람들이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본질로 순종하는 감동을 주는 분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을 성령의 잉태하심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과 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그것이다. 삼위일체란 그런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에게 전하신 뜻과 의(말씀)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 영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 사람이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져야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고, 스스로 그것이 자기 운명이요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순종하게 하는 감동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정체성인 것이다. 방언이나 기적이나 가슴 뜨거워지는 것은 성령께서 그 정체성의 본분을 따라 행하심에 따라서 나타나는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확정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이 다 생각나게 하시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치실 것이라고 하신 것이 그것인 것이다.

보혜사 성령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너희(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물론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고 산상수훈을 전하시는 것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말씀을 하셨다. 요한복음 끝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면 세상이라도 그것을 두기에 모자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일일이 다 깨달아야 하는 것인가? 하나도 예외 없이? 그래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되는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은 문장이나 말씀하신 단어나 말로는 수없이 많은 것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하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존재로 만들었으니 그 자리를 지켜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아들의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행복이며 평안이라는 것, 그것 하나인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진 사람, 그 말씀을 깨달아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고 삶의 목적과 의미가 그것임을 알고서 육신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있다고 하시는 생명인 것이다. 그리고 생명만 있으면 그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은 무한할 정도로 많은 것이기 하고, 또 역설적으로 생명체가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자기가 자기 생명의 이름(정체성)을 나타내는 것 그것 하나를 위하여 그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사람에게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형상, 이미지)을 존재로 지으셨기에 육신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내용이며 의요 진리이시고, 그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몸 가진 사람이라는 만들어서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말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말씀을 표현하시겠다는 계획대로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십자가는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 지으신 목적을 말씀하시는 것인 것이다. 즉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어디로 오시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셨다.(마 16장)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그때 베드로가 유명한 답을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이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마 16:17)이라고 하셨다.


이 대화를 잘 살펴보자. 베드로가 주라고 고백한 예수님은 베드로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런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아주 크게 칭찬하시고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는 권세를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을 한다는 것은 고백을 하는 사람 안에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안에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을 고백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고백은 베드로 자신의 정체성에서, 자기 안에 있는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뜻하신 고백을 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 안에 오시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성령은 사람 안에 오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하심이 이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여자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 안에 받아 들여서 아들, 곧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을 위하여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람 안에서 그 하나님의 법이 깨달아지는 잉태하심은 언제나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의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람이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 생명으로 잉태되는 거듭남이 있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봐야(보고 들어야) 한다. 결혼한 여자가 남자의 유전자를 받지 않고 생명을 잉태할 수 없듯 인생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시기 위하여 높이 달리심으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듣게 표상이 되신 것이다. 그 예수님을 보는 것이 바로 말씀을 듣는 것이다. 남자의 유전자가 여자의 몸 안에 가는 것이고, 땅에 씨가 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성령께서 그 순종(믿음)이 생명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전에 자기가 알고 있었던 사람의 정체성,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았던 육신의 안목을 좇던 자기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회개고, 이것이 구원의 역사며, 이 역사하심으로 거듭난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것이 제자들(우리 모든 인생)에게 유익이고,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심에서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하시는 이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것을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 있는 세계로 가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로 가셔서 달리심이 있어야 사람들이 볼 것이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 안에 예수님의 모습(말씀)이 있어야 그것을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다고 하는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의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이 삶으로 회복되는 역사하심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인 것이다. 성령의 오심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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