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것도, 또 다시 오시지만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시험에 오직 여호와만 경배하라고 하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본질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심청전에 효(孝)라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그 본질이 효가 아닌가? 그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이 육신이 되심 같이 그들의 삶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신을 보는 것이 예수님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시 오신 주님을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로 아는 세계라는 뜻도 함께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정체성인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이 우리에게 임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삶이 되는 삶이 바로 부활신앙이고 거듭난 신앙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몸을 제자들이 만지지 못하게 하신 것은 아직 제자들의 정체성이 부활하신 주님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성령의 강림(잉태하심)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십자가로 가신다고 했을 때부터 그들을 혼돈스럽게 했던 예수님의 정체가 제자들의 심령 안에서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제사를 지낼 때 소와 양과 같은 제물의 머리에 제사 드리는 사람이 안수하는 것은 그것이 같다는 의미인 것과 같다.)


그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을 달리 표현하신 성령으로 잉태되심과 같이 그들의 심령에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그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들 안에서 생명이 되어서 그 생명의 본성이 그들의 삶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이루었고 그들의 삶을 보고 믿는 사람들의 수가 날로 늘었다고 하셨다. 즉 그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시 성령의 감동을 주고, 그 감동이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삶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과 같이, 또한 성령의 강림으로 삶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이 된 사람들과 같이 되는 생명의 번성함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세상에서 있는 일이었지만 세상은 이를 잘 알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들을 핍박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과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는 의미다. 즉 세상은 주님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귀로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순종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아직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 주님을 본다면 재림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재림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보겠는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의 본질이다. 물론 그 본질이 언젠가 형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본질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오시는 것 그것이 재림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안목을 가진 세계를 살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와 뜻을 본다는 것이다.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그 세계에 속한 사람일 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본질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 본질은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그 존재 목적이 삶으로 표현된 사람이 바로 아들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와 혈통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가 아닌가?


세상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알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아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분명하다. 하나님이든 산신령이든 가서 구하는 것이 모두 자기 육신과 같이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관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자기 육신의 삶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의 길로 이끌어 달라고 기도한다. 선교가 다른 것 같지만 선교지에 가서 전하는 것이 결국 그것인데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아래 있는 것이다. 즉 세상이다. 그런 가치관으로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다. 세상이 주님을 볼 수 없는 것이라 하심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이유가 있다고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았고, 제자들도 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살았다는 것은 육신이 숨 쉬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살았다는 것은 존재의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알려 주는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을 때 살아있다고 하고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면 죽었다고 하지 않는가? 시계의 존재 목적이 바로 시간을 알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 안에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 존재 목적이 드러난 곳이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아니라 십자가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법으로 성공이라고 하는 것의 정점에 사람이 섰을 때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가치관을 볼 때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느냐?’ 하는 그 십자가의 자리에 섰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이 육신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살아있는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이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본질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과 같이 살아 있는 같은 세계의 존재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하나인 존재인 것이다. 우리 집에 있는 사과나 마트에 있는 사과나 다 사과 안에 하나인 것과 같이. 예수님을 본다는 것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그 정체성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그 존재의 목적대로 그 삶을 살게 될 것이니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세계에 있는 예수님과 하나가 된 삶인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보리라’고 한 그 제자들이 예수님과 또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나님께 기도(요 17장)하실 때에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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