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었다는 것을 들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하게 되었다. 그것의 해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지만 다만 사람들이(백성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그러던 중에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사람이 죽어 온 민족이 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 되면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을 지었다.


사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한 것은 이때 시작된 일도 아니고, 이때만의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일, 곧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거의 마지막 촉매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시점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다음에 확정이 되었다는 것은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난 것과 예수님이 죽으심을 당하는 것은 나름의 연결이 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예고편이라고 할까?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는 “아무나”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 연관성의 농도가 낮아 보일지 모르지만, 나사로가 베다니에 살았다는 것이 나사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한다. 그 당시에 베다니라는 동네에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천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천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법과 기준으로 볼 때 패배자요 죄인이요 빚진 자(주기도문의 죄가 debt 곧 빚임을 기억)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순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는 삶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신이 세상의 가치 앞에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려 살고 있다. 사는 집이나 입는 것 그리고 자동차와 같이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삶의 수준, 다시 이야기해서 세상에서 선이라 혹은 이긴 것이라 평하는 기준을 엿볼 수 있는 것들에 신경 쓰는 것이 그렇다. 예를 들어 집에 쓰는 그릇 하나를 사도 ‘손님 오면 꺼내 놓기 좋은 것’으로 사니 말이다.(더 우스운 것은 그렇지만 집에 사람이 오는 것은 다들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외모와 외식(外式)에 대해 자의든 특히 세상의 경쟁이라는 것에 실패하는 타의에 의하여 매겨진 자기 자리를 인정하는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때로 정말 비참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 사람의 가치가 되어 버린 돈에 관해서 본다면, 신용 불량자가 되면 불편한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어지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나사로는 그런 삶을 살게 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다.(경제적 문제로 자살하는 사람은 그것이 안 돼서 그런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실은 그것이다. 사람들은 모두다 인간이라는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는 것은 부끄럽고, 어떻게든 연단하고 훈련(바벨탑을 쌓을 때 흙에 볏짚을 넣고 굽기도 한 것 같이)해서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선이며 의고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런 세상의 가치관이 볼 때, ‘도무지 너 같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에, 그것도 모자라서 매일 죄인들과 지내고, 또 안식일은 전혀 지키지 않는 네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며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것을 수용하신 것이다. 순종하셨다는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러지 않고, 이 육신을 부끄럽게 여겨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평생을 수고한다. 그런 부끄러운 모습이 되지 않으려 오히려 사람을 그렇게 지으신 하나님께 가서 어떻게 좀 해달라고 기도하고 떼를 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그야말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난리를 떤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 주셨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나의 종이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주신다. 그러니 너도 이렇게 되게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때로 사람들의 소리에 응답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의도하신 목적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실 때 그 때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목적하신 바를 이루기 위하여 이 육신의 일을 돌보시기도 하시는 것이지, 이 육신의 일을 돌봐주면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잘 도우시는 분인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른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기려 한다. 이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의 가치관 안에서 볼 때, 병자, 세리, 창녀는 늘 죄인이어야 한다. 종교적으로나 세상적으로 그들이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육신 가진 삶은 부족함뿐이라서 그것을 극복하려면 육신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종교적 가치관과 세상적인 가치관이 전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들의 가치관으로 죽여 버린, 그러니까 사회적인 매장 시켜버린 동네의 나사로가 더욱이 육신으로까지 잘 죽어 있는데 이를 살려내 버렸으니 그들로서는 이 사건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은 부족하니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하듯이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 살아야할 가치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근간이 무너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그들의 그 선택이 하나님의 일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온 세상에 나타나는 일이 된 것이다. 말 그대로 한 사람이 죽음으로 민족(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이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아는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된 것이다. 육신은 부끄러운 것이라 여기는 의를 가졌기에 볼품없는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육신을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온 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성품과 형통을 나타내는 존재다. 그것을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하신 것,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난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는데, 이는 이 육신이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니 하나님이 보실 때, “이것이 바로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존재다.”라며 살리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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