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44) 거듭난 삶의 죽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3. 20. 13:25 Writer : 김홍덕

거듭난 삶이라는 것은 어떤 이단에서 부각시켜 사용하다 보니 가끔은 좀 민감한 단어이기도 하지만, 거듭났다는 것은 결국 그 삶이 예수님과 같은 성품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기에 피가 같고 유전자가 같은 것이다. 그래서 피와 살을 먹은 것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거듭났다는 것을 단순히 죽으면 천국에 가는 자격을 얻은 것이나, 아니면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면서 뭔가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들어 주시기도 하는 자격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지만 같은 개체가 되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것을 영어적인 표현으로 하면 예수님은 the Christ이시고 거듭난 사람은 a christ가 되는 것이다.(이러한 표현은 이 불로그에 자주 언급되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자기 육신이 살 동안의 문제 해결과 죽어서 남다르게 천국에 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 동안에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으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를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착각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가 이 땅에 살 동안에 겪는 일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 것으로 알지만 그것은 아주 우스운 이야기다. 누가 차를 기름 넣어주기 위하여 사고, 컴퓨터를 전기 넣어주기 위하여 사겠는가? 그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관여하시는 것은 우리의 문제 해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살 수 있도록 전기나 기름을 공급하듯 육신의 일을 보살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예수님을 또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을 이루기 위함이지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났다는 것은 예수님과 동일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과 동일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사람으로 사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라는 생명을 가졌다면 다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같은 인간 유전자를 가졌다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닌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사람도 다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양한 삶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이다. (그런 다양성이 필요 없다면 하나님께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그만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신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예수님의 탄생, 곧 삶이 시작된 것을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다 그래야 한다. 말씀(LOGOS)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로고스(뜻)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나타났다는 것이고, 성령의 잉태하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그것이 자기 생명,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이 자기 정체성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생명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고 성탄이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일이고 자기의 사건이고 자기의 인생이며 삶이며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되었을 때 비로소 거듭난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런 사건 없이 교회에 다닌다고, 아니면 산신령이나 부처님이 아니라 예수님께 자기 삶의 문제를 가져와서 기도하고 있다고 거듭났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망상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 개념을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만들고 수료한 다음 자격을 배출하고 있다는 것은 더 황당하지만)


그렇게 거듭난 생명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산다. 예수님과 같이 자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는 눈먼 자를 보게 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바로 느끼지 못하는 문둥병을 고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을 살리는 삶이다.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되고 그렇게 십자가에 죄인이 되어 달리면 그 모습을 보고 백부장이 깨닫듯 그 마음에 그 삶이 성령의 감동을 주어 다시 그 사람도 그런 삶으로 거듭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삶에는 죽음이 있다. 바로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라는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생명이 있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명을 가진 삶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늘 죄인이 되어 죽어 나가는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도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삶이라는 것은 늘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고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삶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누군가는 치약의 가운데를 짜서 쓴다. 가족과 같은 공동체 안에 그런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치약을 밑에서부터 짜서 사용하는 사람은 그것이 불만인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것은 끝에서부터 짜서 사용하는 사람이 양치질 할 때마다 치약의 끝을 눌러서 배를 불룩하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 편리를 위하여 자기 뜻대로 한 것에 대하여 자신이 수고해야 한다는 것은 편리를 취한 사람 앞에 패자가, 또 죄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그렇게 수고하고 섬겨야 천국에 간다고 하니 마음에 그럴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되어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그런 삶, 그렇게 늘 남이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것 앞에서 육신으로 더 수고하고, 더 희생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이고, 이 육신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자기 이익을 구하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고, 나의 의가 죽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죽음,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삶에 있는 죽음이다. 이 죽음이 의미가 있는 것은 부활이란 바로 이 죽음에서 다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죽음이 없다면, 십자가의 삶이 없다면, 사람들과 세상이 자기 가치관을 주장하는 것 앞에서 자기 의가 죽어서 수고하고 죄인 되고 희생하는 죽음(삶)이 없다면 부활은 언감생심 범접할 수 없는 은혜와 능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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