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대하여 오해하고 착각하고 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인데, 십자가를 마치 기독교의 권력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순 소리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앙을 전도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오해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모습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주 예를 드는 것이지만 다시 이야기 한다면, 서울역에서 전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전하는 사람 입장에서 전도하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이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님을 믿어서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할지 모른다. 하지만 방법은 자기 기준이다. 그 간절한 마음을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앙이 더 있고, 계시가 더 있다고 스스로 생각이 들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그냥 가서 이야기하고, 심지어 책망하고, 뒤에서 욕하기도 한다. 심지어 ‘사랑하기에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이라고 포장해서. 하지만 이런 모든 작태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금강산 관광이 처음 개시 되었을 때 한국 방송사 기자가 북한 여자 안내원에게 ‘해수욕을 갔다 왔느냐?’ 물었더니 ‘갔다 왔다.’고 했다. 그래서 ‘어디에 다녀왔냐?’고 물었더니, ‘묘향산에 갔다 왔다.’고 해서 뉴스가 된 적이 있다. 해수욕을 모르는 것이다. 그것과 같은 것이다.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해야 천국에 가서 상급을 받는다.’는 마음으로 참고 신념(이것을 믿음이라고 대부분 착각한다.)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들었는데, 또는 읽고 보았는데, 또는 그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을 보았는데 자기 마음에 그것이 자기의 정체성이요, 자신의 존재 목적이요, 이 육신을 가지고 저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삶을 주신(창조하신) 목적이라는 것이 깨달아지고, 그 깨달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 삶의 모든 것으로 표현되는 생명이 잉태되고 자라서 그 생명의 본성에 의하여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도 이상하게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 자기의 자리처럼 늘 자기 삶의 모습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그런 사람이 서울역에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살 찌푸리게 하는 방식으로 전도를 한다?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다른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살지 않는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사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그런 삶을 보면 조롱한다. 어리석다고 비웃는다. 그리고 사회적인 가치관으로 언제나 패자를 만든다. 그런데 그것을 보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비웃던 그 사람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아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진정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때 밑에 있었던 백부장이 바로 그렇다. 당시의 군대 편제에 있어 백부장은 실세였다. 천부장 만부장도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백부장이 모여야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십자가 밑에 있었던 백부장은 세상의 실세의 표현이고 대변인이라는 것이다. 그 백부장이 자기의 부하들에 의하여 발가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을 보다보니 ‘아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의미가 자기 안에 있어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난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은 처음에는 그를 죽음에 내 몰지만, 그 죽음을 보고서는 자신이 죽인 사람, 자신이 비난 했던 사람, 그래서 세상을 어떻게 살겠냐고 조롱했던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그 삶, 그것이 거듭난 사람의 죽음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은 바로 이런 죽음을 당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아무리 용을 쓰고 스스로 신념을 가지고 믿고 있다 해도 나중에 주님께서는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하노라.’하실 뿐이다. 이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았다. 살았다는 것은 그 생명이 있다는 것이니까 그것이 거듭남이고, 부활하려면 죽어야 하는데 그 또한 생명이 있었어야 죽는 일이 있는 것이기에 이 모든 것은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망 가운데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빛을 만나고, 생명이 그 안에 잉태되고 자라서 육신으로 사는 모든 삶을 그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이 거듭남이라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 곧 세상의 가치관, 또한 심지어 신앙에 관해서라 해도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앞에서 늘 죄인이 되어 죽임을 당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어 당하는 그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산 것으로,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보시기에 살리시는 것, 그것이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과 부활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이 없으면 거듭남도 부활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삶에서 태어남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 것이니 거듭남이 없는 것이고, 그 거듭남은 세상의 가치관, 신앙적으로 자기가 옳다는 가치관 앞에서 죽어 나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니 죽임을 당하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진정으로 산 것이기에 살리시는 것, 그것이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이야기 하고 싶다면, 거듭남을 이야기 하고 싶다면 다른 것 이야기 할 것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육신을 가진 삶의 목적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그 목적이 삶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육신의 삶을 보살피는 것이지, 육신이 먹고 마시고 입고 취직하고 결혼하는 문제에 있어 겪는 난관을 해결해 주시고자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런 일에서 겪는 난관은 모두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해서 겪는 일이지, 하나님께서 돕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부활 신앙은 분명히 귀한 것이고, 놀라운 은혜다. 그렇기에 다른 종교에는 없는 것이라는 것도 맞다. 하지만 부활은 다른 종교에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처럼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부활신앙, 그리고 거듭남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육신을 주신 목적을 아는 삶, 그 생명 있는 삶에 관한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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