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44) 거듭남과 부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3. 18. 13:07 Writer : 김홍덕

1. 거듭남


신앙의 여정은 ‘거듭남’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여정은 십자가의 삶을 살고서 부활에 이르는 여정을 거친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거듭남도 죽음 가운데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이고, 부활도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인데, 뭐가 다른 것일까?(이 차이를 생각해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명확히 하려면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이고 객관적인 생명과 죽음에 대한 개념은 육신이 숨 쉬고 살아 있다면 살아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육신이 생명을 잃은 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은 사람(즉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삶이 주어졌고, 시간이 흘러 그것을 인지한 사람의 삶)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 자신을 인지할 수 있게 된 것을 산 것으로,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는 상태를 죽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자신이 살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태인 뭔가를 만질 수 있고, 보고 들을 수 있는 상태를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 본다면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게 된 이유와 목적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기 집에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은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존재하게 된 이유,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이 사람임을 인지했다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존재하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왜?” 보다는 “어떻게?”에 삶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존재의 이유는 무시하고 존재한 상태만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동차가 굴러가지는 않고 그 모양만 유지하려는 것처럼.


이 블로그에서는 항상 <생명이란 목적을 이루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필자의 독자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기본 개념이다. 사람들도 기능을 다하고 있는 자연을 보고 <자연은 살아 있다.>라고 하고, 시각이 맞는 시계는 ‘살아 있다.’하며, 어떤 물건이라도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으면 ‘맛이 갔다.’ 혹은 ‘죽었다.’고 할 뿐 아니라 버린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가진 ‘살았다.’와 ‘죽었다.’의 개념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런 개념을 가진 이유는 바로 생명과 죽음을 그렇게 보시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육신과 같은 실존의 기능성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존재의 목적에 부합하느냐 아니냐가 기준이다. 목적에 부합하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기능이 존재 목적에 수렴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고, 죽음으로 여기시는 것은 육신이 살았다고 해도 그 육신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좇아 살지 않는다면 육신의 기능과 호흡의 유무와 무관하게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또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생명과 죽음>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육신으로 나서 육신으로 생명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모른 체, 눈에 보이는 것을 삶의 본질로 알고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삶을 소비하고 있다면 죽은 것이다. 심지어 육신의 삶을 해결하는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죽은 삶이다. 오염되어 수술에 사용할 수 없는 칼을 의사가 들고 있다고 목적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듭남이라는 것을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모르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십자가를 보고서 깨닫게 되어 그 마음에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는 창조 목적을 아는 삶이 시작되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심령 안에 자리하게 되는 것을 성경은 씨를 심는 것,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것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 안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잉태하심이다. 생명이 속에서 잉태가 되려면 뭔가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 씨가 땅에 심기듯, 결혼한 여자가 남자의 유전자를 몸에 받아들이듯 사람이 뭔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일을 듣고 보았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으로 깨닫게 하는 일이 바로 성령의 일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알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믿는 이도 있고, 도덕적 성자로 아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깨닫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인 것이다.


그렇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육신으로 사는 자기의 삶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전에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없는 삶을 살던 것에서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남>인 것이다. 그러니까 거듭남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던 자기 삶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같은 육신, 같은 모양이지만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 사람이 볼 때 너무 연약하고 부끄러운 이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으로 바꾸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남>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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