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44) 돌을 옮겨 놓으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3. 16. 11:1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가 장사되어 있는 무덤 앞에 가셨다. (당시 유대인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방식은 굴에 시체를 넣고 돌로 막는 방식이었다.) 그리고는 무덤을 막아 놓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만류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고 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기도하시니 나사로가 수건에 쌓인 체 걸어서 나왔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부활 장면과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돌을 옮기라고 하셔서 옮겼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 돌을 옮기신 것이 다르다는 것 정도 외에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러니까 부활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 장면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나사로의 경우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에 더 공감이 되는 사람이니 말이다.


돌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늘 율법을 상징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돌에 새겨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긴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인다. 그것은 율법을 어겼기에 율법으로 심판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탄이 말하기를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한 것도 그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은 율법을 사람이 먹을 수 있게 해 보라는 의미이다.


돌은 사람이 먹을 수 없다. 그것은 율법은 사람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먹을 수도 없고,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이 살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핵심적인 것은 바로 그 율법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나왔을 때 사탄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늘 율법의 기준과 논쟁을 하셨다. 그리고 그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다.


그 논쟁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 사람을 향하여 죄를 사한다고 하신 것,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 메시아라고 하신 것 그 모두가 다 율법과 예수님의 논쟁이었다. 유대인들의 가친관 안에서 그 논쟁의 핵심은 이것이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고, 율법의 조문을 어기는 행동을 하고, 세리와 창녀와 문둥병자들과 먹고 마시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에게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나, 생명은 없으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지키려 하면 스스로 자기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 곧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법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사람이 부족하니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 유대인들의 가치관은 먼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사람의 모습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다고 자기 맘대로 하나님의 만드신 사람을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정의한 것이 죄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람이 행동으로 행한 공로로 의롭게 여기시는 신으로 치환하여 모욕한 것이 죄며, 마지막으로 사람의 겉모습, 곧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여긴 것, 그것이 죄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보다 더 의로운 것으로 여겼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율법이 완성된 존재라는 것을 알 수도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어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하는 생각이 돌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사탄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어두움이고, 빛이 없는 것이고,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그 어두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앞에서 포스팅 한 글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남매들을 사랑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베다니라는 죄인들의 동네에 살고 있는 것 때문이라고 했다. 베다니나 나사렛과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가치관, 율법의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들의 동네다.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와 같은 이들이 사는 곳, 문둥병자가 있고, 온갖 병자들이 모여 사는 가난하고 더럽고 죄인의 동네였다. 즉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다 패자들이요, 죄인들이요, 율법의 기준으로는 살았다고 할 것이 없는 죽은 자들의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 예수님께서 늘 머무셨다. 왜냐하면 그 곳의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그 율법의 기준에 의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율법으로 심판 받아 십자가를 지신 것은, 사람은 율법 앞에서는 늘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육신으로 지켜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율법으로 사람을 심판하면 누구나 죄인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베다니와 같은 죄인의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그렇게 율법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머물렀고, 나사로를 사랑하신 것이다. 그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율법, 돌로 상징되는 그 율법으로 무덤을 막았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해서 나사로가 시체인 것은 율법의 기준으로 시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영광은 나타난다는 의미인데,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죄인이 되어 죽은 사람이 된 자, 그리고 그것은 시인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산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 바로 나사로를 살리신 것, 곧 부활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에 그것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율법의 관점, 세상의 가치관, 그리고 그런 가치관으로 보는 육신을 가진 사람을 보는 안목과 같은 것으로 볼 때 죽었다고 할 수 있고, 패자고,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인생일지라도, 오히려 사람이란 그런 세상의 관점 앞에서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나, 자신들의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죄인의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졌다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다 보니, 세상의 법으로, 율법의 가치관으로 죽은 사람, 돌에 갇힌 사람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다 보니 죽은 자가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을 치우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는 사람은 율법으로 가둘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죽은 자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기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것이 예수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것을 확정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의 삶을 죄인으로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며 율법을 지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육신을 입고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기에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놋뱀과 같이 들리신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고서 자신도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순종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게 만든 사람의 모습은 스스로 선악의 기준을 가진 사람들의 세상의 법으로 볼 때는 부끄럽고 죽어야 마땅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면 자신이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말씀이 그 육신으로 표현되는 사람,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어 그 생명이 표현되는 삶을 사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고 복음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으로 사는 자기 삶을 늘 부인한다. 항상 육신 이상의 능력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노력한다. 그러다 안 되면 교회나 신전을 찾아서 신비한 능력을 구하고, 자기 육신으로 이루지 못할 본질도 아닌 세상의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아담의 모습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로 가둔 율법이 자기 가치관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나사로는 자기 정체성을 인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인정한 자기 정체성, 곧 사람이 세상의 법으로 보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베다니에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모습, 모든 인생에게 기대하는 모습인데, 그를 돌로, 율법으로 가두어 시체로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진 자기 삶의 모습을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과 부활은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생명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에 만드신 목적 안에 있고, 그 목적을 표현할 때 비로소 생명이 있는 것이다. 시간을 알려고 산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을 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처럼. 그 생명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가둘 수 없다. 죽음 가운데 두실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인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산 것이 어떻게 사람이 볼 때 죽어야할 기준 아래 죽은 자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고, 예수님도 돌에 갇히실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누구라도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부활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