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44) 부활의 목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3. 11. 13:31 Writer : 김홍덕

부활, 그것을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최고의 차별성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지막 날에 다시 산다는 것을 믿는 것이 부활이라 생각한다. 마리아처럼.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간혹 ‘그러면 화장한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난센스다. 설사 하나님의 부활이 그런 방식이라 치자.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그 정도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의심하는 것이 우습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부활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 더 문제다.


물론 부활은 약속하신대로 마지막 날에 다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정의되는 모든 것, 마지막 날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다시 산다는 것과 같은 것을 눈에 보이는 세계의 것으로 보고 있다면 그것은 부활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은 그 몸을 다시 사용해야할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때 다시 사는 것이지, 살려 놓았는데 이전과 똑같은 정체성과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면 굳이 살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아예 새로운 사람을 하나 더 만드시는 것이 더 낫지. 그러면 새롭기라도 하니.


부활이란 다시 산다는 것이다. 다시 산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럴 것이 아니면 왜 다시 살리겠는가? 새롭지 않다면 개가 토한 것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을 믿어서 부활한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그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산신령께 빌던 것을 하나님께 빈다고 달라진 것이 아니다. 신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비는 그 당사자는 같은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냥 한식 먹던 사람이 양식을 먹는 것으로 식성이 바뀐 정도의 달라짐이지 정체성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부활이란 그런 달라짐이 있어야 부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부활은 반드시 거듭남을 전재로 한다. 거듭남이 없는 부활은 없다. 다르게 남이 있어야 다르게 사는 것이 있는 것이다. 동일한 육신을 가진 삶을 살지만 그 가치관이 다르고, 빛이 비췸으로 다른 세계를 인식하게 된 생명과 안목을 가지지 않았는데, 부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쳐도, 남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도 그것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고전 13장)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부활을 단순하게 사람이 다시 사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부활은 명백하게 이유가 있다. 다시 살아야할 이유가 있어 부활을 하는 것이지, 그럴 이유가 없는데 부활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의 정체성이야말로 진정으로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 하나님이 육신을 주신 목적 안에서 볼 때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이기에 살리신 것이라는 것이다.


나사로 역시 마찬가지다. 나사로가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보다 좋아했던 사람이라 살린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유라면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도들은 아직 살고 있어야할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전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 다른 가치관으로 사는 삶이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으로 여기는 삶이고, 살아 있는 삶이 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삶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 생명이 없는 사람은 부활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듭남과 부활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산신령께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던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과 같은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달라졌다는 것, 안목이 달라졌다는 것,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는 것은 같은 육신을 가지고, 같은 모양으로 사는 것 같지만, 이전에는 육신의 삶을 본질로 알고,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산신령이든 찾아가서 이 육신의 문제를 의지하던 신앙을 벗어 버리고, 이 육신을 주신 삶의 목적과 본질이 눈에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위함이라는 것을 아는 세계가 열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열려야 이 육신의 삶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살아서 믿으면 죽지 않고, 무른 죽어서 믿으면 다시 산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죽었다는 것이 육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죽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육신은 살아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사는 자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부활의 삶이 바로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삶을 산다는 것이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과 말씀이 예수님과 동일하게 육신을 가진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램프의 요정으로 여기는 것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람이 가진 육신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이 되는 무능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기 모습이고 자기 정체성이며 그 육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인 것이다.


그 믿음이 있으면 육신의 삶이 달라진다. 거듭난 삶이 되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삶이 된다.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육신의 삶을 위하여 존재하는 모양새이지만, 육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신 삶이라는 것을 알면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사용한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렇게 달라지는 것,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고, 부활 생명, 새 생명을 주시는 이유인 것이다. 이런 이유가 없는데 새로운 삶을 주실 이유가 없다. 새로 살리지 않아도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이나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데 뭣 하러 죽은 놈까지 살려서 그러는 꼴을 보시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