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라는 동네에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라는 남매가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사랑을 받을만한 어떤 것을 보여준 사람들이라는 것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특별히 생각해 볼 것은 그들이 베다니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 26장에서 문둥이 시몬이 그 동네에 살았다고 했는데, 그 시대에 문둥이가 사는 동네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가치관에서 볼 때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바로 베다니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동네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동네에서 문둥이를 고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동네를 드나드셨다는 것이고, 더욱이 나사로를 ‘친구’라고 하셨다는 것은 그 동네의 사람들이 가진 어떤 것과 예수님이 가진 의가 통하고 같았다는 의미이다. 친구란 의가 같아야 맺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은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다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어떤 사람이 죽음에서 다시 살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한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완전무결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한 마디로 화장실도 가시지 않을 것 같은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교회학교 초등부 아이들이 그런 것을 묻기도 하는 것이다. 누군가 그런 이미지를 심었기에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결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볼 때 한 마디로 부정한 존재였다. 의가 같지 않으면 같이 밥도 먹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세리와 창녀와 같은 죄인들, 그리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문둥병과 같이 먹고 마시고 있는 예수님은 부정함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3남매인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은 그들이 베다니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 크다. 문둥이가 사는 동네에 산다는 것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죄를 시인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은 자기 죄를 시인하는 사람, 자기 정체성을 인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을 숨기려 한다. 알고 보면 다들 똥 싸고 오줌 누는 존재인데 그런 교양 없는 것도 에티켓 있게 처리하는 척하는 것이 사람이고, 다들 남들이 볼 때 교양 없는 습관도 있고 말도 하지만 남들 앞에서 그렇지 않은 것처럼 사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주장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남들보다 못하면 안 되고, 뭐든 남 같이 아니 그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옷이고 외식이며 제사장의 옷이며 무덤에 칠한 횟가루에 불과한데 말이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유대인들이 죄인의 동네로 여긴 동네에서 거하신 것은 그들은 최소한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감추는 존재들은 아니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취해야할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다는 것은 예수님도 그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똥 싸고 오줌 누는 그런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육신이 말씀이 되어…”라는 그 한 말씀이 그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 인생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육신의 모습과 그 행적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부활의 생명을 얻는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전하신 말씀대로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먹고 마셨다는 것을 성경에서 보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자기도 당시의 유대인들의 가치관에서 세리와 창녀와 같이 노는 예수님이 죄인이었듯, 지금 세상의 경쟁에서 이겨야 선한 존재가 되는 법 앞에서 자신들도 죄인이라는 것- 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나사로가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살리신 것을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산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4-25)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어떤 사람의 어떤 죽음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리심을 받는지를 보이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아들이 영광을 얻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을 볼 때는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의 어떤 죽음을 살리시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죽음,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죽음은 예수님께서 원래 사랑하시는 자, 곧 자기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 자, 선악과를 먹고 자기 몸을 부끄럽게 여긴 아담과는 다르게 자신이 연약하고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나 세상 사람들이 가진 ‘작어도 이래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라는 기준 앞에 자신의 삶과 육신의 능력과 또 자기 정체성은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고 그 죄인으로서 죽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살리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성경도 하나님도 예수님도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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