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그 자신을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다. 길, 양의 문, 빛, 떡, 피와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그 자신이 바로 <생명이고 부활>이라고 하신다. 부활이라는 것은 동사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 부활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어떤 사람 그 자체가 부활이라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그런 말이다. 생명은 그렇다고 쳐도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많은 것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말씀을 하셨을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 이 블로그를 쓰면서 여러 번 언급하는 것이기도 한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도무지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정의를 하고자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 육신이 사는 동안 일어나는 문제의 해결이나,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정말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는 곧 OO이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이심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은 결국 내가 누구인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나사로를 살리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믿을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엇을 하시는 분으로 믿는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라는 것에서부터 심지어 예수님께 기도하면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육신을 가진 인생이 죄가 있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셨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믿을 때 죄가 사해지는 것이지, 예수님께서 때를 밀어주듯이 죄를 사하는 분이라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역시 우리의 모습을 보이셨기에 그것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본 모습인 이 육신을 자기의 모습으로 인정하라고 그렇게 십자가에 벌거벗겨져서 달리신 것이지 차비를 대신 내듯 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 아니다. 


더욱이 예수님께 돈 문제, 먹고 사는 문제, 직장 문제, 결혼 문제와 같은 것을 기도하고 바라고 주실 것으로 믿는 것은 정말로 가관이다. 그것은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이 화나고 창피한 일일 지경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또한 예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 것으로 예수 믿을 것이면 그냥 사회에서 아부하며 성공하는 것이 더 빠르다. 그게 목적인데 뭣 하러 교회에서 그러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튼 그렇다.


다시 돌아와서 보자. 예수님은 때로는 빛이라고도 하시고, 문이라고도 하시고, 길이라고도 하시고, 진리라고도 하시고, 생명이라고 하시고 부활이라는 등 자신을 그런 것이라고 하셨을까? 이러한 것들은 하나하나 의미가 있는데, 종합적으로 보면 세계가 바뀌는 것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빛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보고서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깨달으면 새로운 세계가 인식되기에 예수님이 빛이시고, 문이라는 것도 다른 세계로 전환하는 것이며, 길도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세계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람에게 진리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진리라는 것은 그렇게 예수님이라는 빛과 길과 문을 지나서 이르는 자리가 사람의 원래 자리,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의 나리이기에 사람에게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사람에게 진리인 사람의 자리에 이르러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서 살면, 하나님께서 그 삶을 살아있다고 여기시기에 그것이 생명인 것이다. 몸이 숨 쉬고 살아 있다고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몸이 살아서 숨 쉰다는 것은 시계가 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불과하다. 시계는 겉모습이 멀쩡해야 산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맞아야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듯, 사람도 육신이 멀쩡하고 팔팔하게 돌아다닌다고 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어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을 때에 비로소 ᄉᆞᆫ 것, 곧 생명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인 것이다.


그것이 부활이다.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보고서 그 예수님이 바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의 정체성을 보이신 것을 믿게 되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기에 그것이 바로 부활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이신 것이고,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빛을 만나 이전에 알지 못하든 사람으로서의 삶의 목적과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나, 예수님이라는 문을 지나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에 이르는 것(문을 지나는 것은 그 문이 정한 자격을 가졌다는 것)이 다 사람에게 진리고 생명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진리이다. 예수님께 직장이나 결혼이나 사업 문제의 길과 해답을 얻는 것이 길과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그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이 빛이시면 자신도 빛을 보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이 길이면 자신도 길을 아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이 문이면 자신은 그 문을 지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예수님이 진리면 자신도 사람으로서 진리 가운데 있는 것이 되며, 예수님이 생명이시기에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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