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즉 목숨은 결국 소진 된다. 그 목숨을 버린다는 개념에 대한 일반적으로 고착화된 것은 단숨에 버리는 것만을 생각한다. 신앙 안에서 본다면 순교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고, 자기 맘대로 죽기도 힘든 이 삶이 소진되는 것, 결국 죽는 것은 목숨이 결국은 버려지는 것이다. 다만 이 삶에 대하여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만 남는다.


사람들이 가진 목숨은 일생이다. 목숨이 끊어지면 일생이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삶이 주어졌으니 그저 살고 있다. 그 안에서 누구는 좀 더 열심히 또 성실하게 살고, 또 누구는 체념적으로 살기도 하고, 또 누구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살기도 한다. 삶의 모양보다 먼저는 왜 사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나서 삶의 모양이다. 그리고 나면 모양은 목적에서 나온다.


목숨은 어차피 버려진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 그 목숨이 자신에게 왜 주어졌는지를 아는 이는 목숨에 대한 권세가 있는 것이다. 버릴 수도 있고, 다시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목숨에 대하여 자살도 할 수 있고, 또 육신이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 육신을 어디에 소비할 것인지에 대하여 아는 것이 바로 목숨에 대한 권세라는 것이다. 이 목숨, 육신을 가진 삶을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사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주어졌으니 그냥 사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목숨이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이 육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삶이다.


예수님과 같이 목숨을 버리는 것,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대하여 오해한다. 십자가는 위대한 것이 아니라 죄인의 형틀이다. 예수님께서 죄를 대신하신 것은 사람이 어떤 것 앞에서 죄인이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가치관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은커녕 마을 동장의 아들도 어림없다. 초라한 목수의 아들에다, 죄인과 창녀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관과 안목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길만한 것이 없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세상의 가치관과 안목이다. 이 블로그에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는 교회는 옳은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세상의 경쟁에서 져서 죄인이 되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연약한 존재인 사람의 모습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패배자고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곳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느냐고 조롱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존재라고 스스로 규정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되어 초라하게 죽어가는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죄인이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안목으로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조롱의 대상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여기면서 또 십자가는 사모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임을 아는지 알 수 없다.)


반면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죄인이 되는 인생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도 십자가에 달리신 죄인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숨이 있는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반하는 죽음과 같은 삶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죽음을 성경에서 성도들의 죽음, 신앙을 위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날마다 죽노라!”와 같은 말씀 속의 죽음이 이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을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도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일을 난처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역 광장에 모여서는 부흥회하듯 찬송을 부르는 것은 아주 난감한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예수 믿기에 욕먹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 비난 앞에 서는 것을 예수를 위하여 죽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것은 착각이다. 미안하지만.


예수님을 믿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왜 그런 수고를 하느냐? 바보처럼’과 같은 말을 듣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마음 안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 때문에. 신앙이 없다며, 그러면 지옥에 간다고 남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보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도록 살아내는 수고를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더욱이 자기 안에 있는 생명으로 인하여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서 그것이 바로 목숨을 관장하는 권세다.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우리 목숨은 그렇게 소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삶이 주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은 삶에 대한 권세가 없는 것이다. 삶에 떠 밀려서 사는 것을 어떻게 권세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삶이 어떻게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어떤 목적에 자기 삶을 소비하는 삶이 되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목적을 모르고 살면 아무리 삶이 능동적이라도 주권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목적도 모르면서 능동적으로 사는 것은 잘하면 잘할수록 더 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목적을 아는 삶,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고, 그것이 또한 자기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삶을 그 목적대로 살아간다. 즉 그 목적 안에서 삶을 소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