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문은 양이 아닌 세계에서 양의 생명을 가진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다.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양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양이란 하나님의 양, 즉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법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실 그것을 모르는 신앙인을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지고 신앙인이 바로 믿느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도 옳지 않다. 다만 사람들이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또 자기가 인생에서 겪는 문제의 해결을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기도하는 것 그것만으로 자신들이 양의 문으로 들어갔다고 여기는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삶의 문제를 기도하고 의탁하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냐?’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TV에 나오는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내가 그를 아는 것만으로 아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도 나를 알아야 비로소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아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 수 있는 동질성 있는 관계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다. 즉 존재의 목적이 양에게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의가 바로 예수님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기본 통치 이념, 혹은 나라의 기본 의(義)가 바로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시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은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역시 그런 사람이어야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문을 지나는 것은 문 저편의 세계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에는 경비가 서 있는 것이다. 문 너머의 세계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의 문을 지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목숨이라는 것과 생명이라는 것은 다르다. ‘물은 생명’이라는 말은 있어도 ‘물은 목숨’이라는 말이 없는 것이 그것이다. 목숨은 육신의 생명 아니 목숨을 말하는 것이고 생명은 한 개체의 육신에 관한 것에 한정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신 것은 육신을 그것에 사용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목숨을 버린다고 하니 무조건 단숨에 버리는 것, 순교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것도 오산이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의 정확한 표현은 목숨이 붙어 있는 육신을 가진 삶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용된다는 것이 바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반드시 (목숨이)죽기에 다만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선한 목자는 양의 세계의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다. 어떤 목자는 목숨을 순교하듯 단숨에 버리고, 어떤 목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목숨 가진 삶을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양의 세계, 곧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하여 자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목자가 목숨을 바치는 그 의미를 아는 양이어야 양의 문을 지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양의 세계, 양의 문 너머의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이란?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음성)을 알아듣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신 곳은 십자가다. 그러므로 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믿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고, 양의 문을 지난다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자기 목숨을 어디에 사용하는지를 알고 그렇게 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에 대하여 상당히 잘못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상황이라 모두들 꺼려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그 부담스러움을 무릅쓰고, 또 그렇게 말하고 나서 욕먹을 것을 알지만 총대 매듯 가서 말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살아서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그것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육신을 그렇게 소모하는 것이 바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말도 할 수 있고, 때로는 해야 한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이 화를 낼 정도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로 인하여 죽이려 할 때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순순히 끌려가서 죽으셨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총대 매듯 말을 할 때는 그 말로 인하여 반발할 때에 그 주장 앞에 죄인이 될 것이 아니면 말을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려는 생각이 없다면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의 자칭 목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자신이 목자로서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듣지 않는 이를 심판하는 것이다. 자기가 설교한 대로 하지 않는다고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선한 목자라면, 설교가 아니라 그 삶을 보고서 그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살아내는 것이 바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삯꾼 목자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다 도둑이고 강도다. 그들이 양을 들먹이는 것은 양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서 괜찮은 줄로 알지만 그것이 바로 착각이다. 하나님의 의를 전하러 오신 예수님은 자기 의를 주장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의가 자신을 주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때 끌려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는 양들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위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목숨이 있는 육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도 양을 안다고 하신 것은 말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정체성이 같아야 양의 문을 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체성은 그 정체성으로 인한 형식과 행동과 표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소비하는 것이다. 바로 그 삶을 양들이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음성을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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