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44) 거듭남과 부활(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3. 19. 12:24 Writer : 김홍덕

2. 거듭난 삶


거듭남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상태인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는 육신의 생명, 곧 목숨이 살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살았다 혹은 죽었다 하는 것의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사람에게 기대하는 관계, 그것이 회복되고 유지되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창조주의 뜻을 넘어서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야를 만나신 하나님은 바위를 가르는 바람이나 돌을 사르는 불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육체적인 능력 범위 안에서 만날 수 있는 미세한 음성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육신으로 접할 수 있는 접점을 무한 상회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분인데 그런 위대한 능력을 사람이 소화하기를 바라시거나 대신하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태양에게 기대하시는 목적이 있고,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창조의 목적이 있다.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이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바라시는 것, 그것이다.


이 육신은 연약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생 전체를 소비한다. 그리고 얼마나 더 육신의 정체성을 극복했는지가 바로 세상에서의 성공을 가늠 하는 열쇠가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을 미완이나 부족하게 만들고, 살면서 얼마나 극복하는지에 따라 천국에 들어오게 하시겠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부족함이나, 극복해야할 것이나, 단련해야 할 것이 전혀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온전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사람의 이 정체성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래서 하나님께 ‘육신이 뭔가 하려는데 안 되니 초인적인 능력으로 나를 어떻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자식이나 다른 사람이나, 또한 사람들이 도모하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좀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것이 보통 이야기 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발버둥에 불과할 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부끄럽게 여기는 육신을 가진 삶의 정체성을 그런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 가서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반면,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사람들이라는 사람들은(기독교인들에게 그런 권세가 합당한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의 법과 자기 육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한다. 바로 이런 모든 상태,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상태에서 육신을 하나님과 같은 가치관으로 보고, 이 육신을 가진 삶의 정체성 곧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살게 되는 전환,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이 거듭난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과 다른 것이 없다. 거듭났다고 갑자기 사람이 밥을 안 먹어도 된다거나, 하늘을 난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방언을 받아야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개가 웃을 일이다. 자신의 삶이 거듭난 것인지 아닌지는 사실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성경을 읽고서 예수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으니 지금 내가 좀 하기 싫지만 그래야 하는가 보다 싶어서 하고 있다면, 거듭난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을 하는 이유가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듭난 것은 생명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육신이 같아도 그 육신을 움직이는 삶의 이유가 달라진 것이다. 유전자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고서 자기는 그러기 싫지만 그래야 된다고 하니 하는 것은 그 어디를 봐도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밖에서 그 몸을 제어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속에서 생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겉만 칠한 회칠한 무덤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거듭난 것은 오히려, 마음에는 성경처럼 살지 않으려는 생각이 들어도 어느새 그렇게 하고 있는 삶,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도 그러고 있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자식들이 아무리 아버지 같지 않으려 해도 자기 마음 안에서 아버지와 같은 본성이 나오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거듭남이 생명에 관한 것일 찐데 삶의 이유와 사소한 행동 하나의 이유와 의미가 속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생명이 아닌 것이고, 그러니 그것은 거듭난 것이 아니다.


거듭난 삶은 성경을 지키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문득 자신의 사는 모습과 자기 안에서 나오는 마음들이 성경대로인 것을 인식하는 그런 삶이다. 억지로 하고, 각오해야 하고, 노력하고 있다면 애석하지만 그런 것은 거듭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 거짓이다. 또한 거듭남은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사람 밖에 있는 것, 곧 형식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몇 월 며칠이라는 형식에 관한 시간 개념으로 그것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받은 일시가 언제다.’는 식의 표현 또한 개가 웃을 일이다. 그런 모든 것은 거듭남, 아니 기본적으로 생명의 개념을 모르는 것이다.


이 거듭난 삶은 예수님의 삶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이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생명)이 자기 육신으로 나타나는 삶이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한다. 이 그리스도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명분)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기준에 의하여 

하나님이 아들이 아니라는 심판을 받아 

죄인이 되어 죽으신 사건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같은 이치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같은데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물고기가 어부에게 잡혀서 땅에 올라오면 사람이 되지 않듯 살아가는 자리, 살아가는 시대와 모양이 아무리 달라도 유전자가 같으면 같은 법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어떤 일에 대해서라도 더 밝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주장하는 것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그렇게 될 때 진정한 섬김과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을 배우는 학생이 수학박사가 이야기 하는 것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며 무시한다고 치자. 그럴 때 수학박사가 분명히 자기가 맞게 알고 있음에도 자신은 모르는 사람처럼 무시당하면서 그 학생이 스스로 알 때까지 섬기듯이 가르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의 자세는 어떤가? 한 마디로 ‘나는 하나님 믿어서 천국에 가는데, 하나님 믿지 않아서 사는 것이 부정한 너희들은 도무지 뭐냐?’는 식의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서울역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겠는가? 정말 전도하고 싶다면, 또 내가 믿는 것이 옳다면 그 옳다는 것을 아는 이유로 모르는 이들이 알 때까지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이고, 하나님께서 이 육신을 주신 이유인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습하는 교회에 대한 비난에 목사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잘 몰라서 그런다.”식의 답변을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그야말로 십자가를 모르는 아니,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삶이나 그런 사람들의 가르침 속에 어떻게 거듭남이 있겠으며, 거듭난 삶이 있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거듭난 삶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으로 돌아서므로, 그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안에 있어서 오히려 그 목적을 잊고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예레미아의 마음과 같은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의 모양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의인(더 아는 사람, 더 밝은 사람, 더 가진 사람)이 죄인(모르는 사람, 패자, 가난한 자)을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는 삶 그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어떤 것도 거듭남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오직 이 하나뿐이고, 예수 이름 외에 구원 받을 이름은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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