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성경대로 사는 것’,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과 같이 다양한 것들이 있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시간표의 과학, 수학, 영어, 국어와 같이 다양한 과목으로 생각한다면 문제가 어려워진다. 이런 모든 것은 사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의 다양한 모습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예수님이 가지셨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하나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에 관한 것이다. 생명이 안에 있으면 그것이 육신을 가진 삶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사람이 인식하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도 같은 생각이시다. 하나님이 생명이시니 당연한 이야기고,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만드신 창조주의 성품이 그렇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생명이 가장 귀하다면, 예수님 당시 처녀들에게 목에 걸고 있던 향유 옥합은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이었다. 사람도 옥합 같은 육신 안에 향유와 같이 담긴 영혼의 정체성 그것이 더 귀한 것이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 안에 있는 정체성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자기 안에 담아 둔 정체성, 곧 삶의 목적과 무엇을 귀한 것으로 여길 것인가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과 같을 때 진정한 향유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생각할 때 아무리 귀하다고 여겨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귀하지 않다면, 그것을 옥합을 깨듯 육신의 수고를 들여서 표현해 낸다 해도 오히려 악취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 안에 담긴 것이 향유와 같이 귀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가치가 하나님의 가치관과 동일할 때 비로소 향유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마리아가 깨트린 향유가 가룟유다에게는 낭비(악취)로 예수님께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다 전해져야할 향기로 여겨졌던 것과 같이.


기본적으로 마리아가 향유가 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장사를 기념했다고 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향유와 같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고 그 귀한 것이 육신을 소모해가면서 향기와 같이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때 사람 안에 있는 향유와 같이 귀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이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존재의 이유임을 아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옥합을 깨트리듯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니 깨어진 옥합 안에 있던 향유가 방안에 퍼지듯이 온 세상에 예수님의 정체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건이기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일을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일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 마다 전해질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해지는 자리에서는 이 마리아의 사건을 본문으로 설교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을 가진 사람의 삶이 옥합이 깨어지듯 육신이 소모되고 수고하며 모두가 자기가 옳다 하는 사람들의 의 앞에서 죄인과 같이 죽어지는(깨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을 전한답시고 자기 기준으로 늘 복음을 전한다. ‘내가 예수님을 아니 내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식이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의 말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다.’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망조가 들 듯 사회로부터 외면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은 복음을 가진 자의 방법과 생각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지지 않은 자가 생각하는 대로 복음 가진 자를 대하고 죄인 취급하고 뭘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그것에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옥합이 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이 귀한 향유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것은 당연히 하나님께 귀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고, 무엇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얻은 것, 그것이 사상이든 재화든 심지어 신앙생활의 공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 어떻게 귀한 것이 되겠는가 하는 문제는 제쳐 두어도 ‘존재의 신께 소유와 공로를 드림이 정말 하나님께 귀한 것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것, 또 40일 금식기도와 같은 신앙의 공로와 같은 것을 하나님께 향유와 같이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그 목적을 표현해 낼 때 귀한 것이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스마트폰으로서의 기능이 잘 될 때 귀한 것이지, 못 박는데 잘 된다고 귀한 것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무엇이 향유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향유는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있을 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아무리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충만하여도 그것을 옥합을 깨트리듯 자기 육신을 소모하고 죄인이 되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그 섬김이 없다면 향유도 아무 것도 아니고, 옥합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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