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3장의 바울사도의 간구 이후에 권면하는 말씀들은 여러모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규범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무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어떤 생명을 가진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사도의 간구의 내용과 그 삶의 정체성이 동일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탐욕을 버리라는 말씀은 다분히 육신의 일로서도 충분히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인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가장 핵심입니다. 육신의 행위에 대한 규범에 대한 말씀은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다움을 유지하면 자연스레 지켜지는 것입니다.


음란을 먼저 설명해보면 사람들은 그냥 쉽게 간음과 같은 성적인 문란이나 탐욕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근원적인 간음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 짝을 탐하는 것입니다. 음식 재료를 다듬는데 사용하는 칼이 그 날카로움을 가지고 다른 것에 사용되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간음은 자기 짝이 아닌 상대와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정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과 다른 것을 사람이 사모하는 것이 간음이고 음행인 것입니다. 그 처음은 아담의 선악과 선택이었고, 그 이후에 노아 홍수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은 것이었고, 사도들의 시대와 오늘날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말씀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아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고민하는 시점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지금 바울사도의 권면은 단순히 그 문제를 넘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마귀의 유혹과 같은 간음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더 비중 있는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충만해지기를 간구한 대상들에게 하시는 권면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육신적인 음행은 성경 어디에서도 용납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육신적인 음란에 대한 경계를 본질로 삼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그 본성을 좇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들고 인생을 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살려고 매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음란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그 삶이 음란할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것이 해결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귀속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도 궤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산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인데,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았고 그 행실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 그것을 나타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새로운 삶의 모습은 바울사도가 열거한 것을 행위로 지켜내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이 그 본성대로 살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권면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음행도 그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음행이고 더러움도 그 하나님의 본성에 비추어 더러운 것,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인생을 주신 뜻과 다른 본성을 좇는 것과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본성의 표현들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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