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 기준으로 봐야하는 것은 당연한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악이라고 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악이고, 훼방이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람들이 가진 법리나 도덕이나 양심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에 대하여 사람들은 하나님만 믿으면 사람들의 보편적 가치관을 무시해도 되느냐의 반문을 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대로 행하는데 그것이 사람의 보편적 상식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현대에서 만든 자동차의 부속품의 보편적 기능이 현대자동차의 설계자와 다르다는 이야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악독, 분냄, 떠드는 것, 훼방하는 것 그리고 모든 악의는 다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기대하시는 것에 반하는 것은 사람들의 기준에 아무리 선하고 보편적 상식에서 훌륭한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훼방하는 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용서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의 기준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사도도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을 행해서는 고린도에 가게 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표현을 한 적도 있는데 지금은 정작 용서를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사도가 이중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용서하려면 그것에 대한 개념이 달라야 합니다. 같은 파이를 먹으려다 빼앗겼다면 그것은 용서가 안 됩니다. 그것은 단지 참는 것이고, 빼앗긴 상황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세계라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세상에서 성공하겠다는 것을 추구하면서 서로를 용서하는 것은 일시적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용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이 핵심인 이유를 용서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생명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가치가 달라졌고, 먹을 것이 달라졌고, 추구하는 것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 거듭난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인하여 발생하는 피해나 손해는 다툼이나 분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엄청나게 많은 순간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육신의 어떠함, 곧 세상 가치관으로 가치 있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그것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들로 인하여 당하는 피해나 손해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용서를 하려면 예수님과 생명이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생명이 같아지는 것이 거듭난 것이고 그리스도와 같이 용서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바울사도의 권면도 이것입니다.


훼방과 악독은 버리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시는 것과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을 버리라고 한 것은 맥락이 같은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하다고 여기시는 것이나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할 리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가 노함과 분냄과 훼방과 악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성품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자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의 연장선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그 성품으로 사는 것에 대하여 유념하라는 것, 본분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것에 충실하면 서로 용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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