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의 이어지는 권면들은 지금 사람들이 성경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말하는 생각의 프레임과 다른 말씀입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 말씀들을 준수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자신의 상황이나 심지어 구원의 운명도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조건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조건의 결과에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회칠하기도 하지만 성경 말씀을 어떻게 보는지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어떤 일의 조건으로 보고 지키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고 율법 신앙입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은 그런 사람들에게 하시는 권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을 본 교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시험 하신다.’는 식의 반응을 합니다. 행여 그 사람이 사업을 인하여 교회에 소홀히 한 면이 있다면 ‘성령을 근심케 했다.’는 말이나, 때로는 교회에 소홀히 한 결과로 그렇다고 말을 하기 일쑤입니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입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이나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권면한 말씀들은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의 가치관이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 죄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성령께서 그 고백함을 인하여 생명을 잉태케 하시면 그 다음에 이 말씀들을 지키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강조하는 것은 구원의 인치심에 관한 것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인치심은 봉인 sealed라는 의미인데, 이것을 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봉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두어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해제나 해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셨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생명으로 난다는 것은 그 생명의 어떠함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인치셨다는 것은 성령이 변할 수 없는 생명으로 잉태케 하셨다는 의미이고, 그 성령이 근심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그 생명이 생명다운 삶을 잘 살아가는 것에 대한 근심인 것입니다. 성령의 근심은 마귀의 유혹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에 대한 근심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인식하고 깨달은 사람들을 위한 근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치심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보답의 성격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사람들이 알게 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에 대한 보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구가 목적 안에서 보답하는 것은 그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고, 그 빛을 자신이 낼 수 있을 때까지 빛을 내는 것이 보답인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사했으니 이제 죄를 범하지 않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생각하고 다짐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자신이 육신으로 지은 죄에 대한 대속으로 보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죄를 사했으니 착한 행동과 생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속이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종이 되는 것은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분명한 창조 목적 아래 창조된 피조물인 사람은 그 창조주의 목적하심을 자신의 존재로 갚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갚는다고 하니 고달프고 억지 같지만 어떤 존재든 그 존재하는 목적대로 소비되는 것이 가장 온전하고 평화롭고 영광된 것입니다. 


사람을 상하게 한 식칼은 그 성능을 잘 보여준 것일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음식을 만드는 것에 사용되지 못하고 증거물 보관 장소에서 남은 생을 보내야할 텐데 사용되지 않는 평안함 가운데 있다고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이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자기 삶의 존재 목적으로 순종한 사람은 그 삶이 때로는 하나님의 종인 삶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아들로서의 삶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압니다. 그것을 인하여 괴롭다 여기지도 않습니다. 목적 안에 인생이 소비됨이 즐거운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바울 사도의 이 권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강제된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이 늙어가고 힘이 없어지는 것을 슬퍼한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의미도 모르는 것이라는 것도 함께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변할 수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심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생명은 봉인된 것과 같이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명으로 나게 하신 성령께서는 그 생명이 생명답게 유혹을 이기면서 살기를 늘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간구하신다는 것은 행여 벗어날까 근심하신다는 것이 내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치심은 우리의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의 빚을 갚으며 사는 즐거운 인생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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