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루는 오늘날 아침에서 저녁까지의 개념이라기보다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를 이르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개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창세기에서 하루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저녁, 곧 해가 질 때를 나누는 시점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해가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의 시간 기준은 또 다른 날이 왔는데 그 때까지 분을 품고 있지 말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로 분을 내어도 그것이 새 날, 곧 더 장성한 생명이 되면 이전의 일로 분을 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설사 주의 일로 분을 낸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새로운 날을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새로운 날의 기본적인 개념은 삶의 정체성이 바뀐 후 맞이하는 날이자 세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늑대로 살다가 양이 되어 맞이하는 새 날과 같은 것입니다. 입대 후 맞은 첫날, 결혼 후 맞는 첫날과 같은 날도 이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분, 곧 정체성이 달라진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해가 지고 새 날을 맞이한다는 것은 한 세계, 하나의 가치관이 새롭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그 장성함이 충만해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예레미아의 말씀과 같이 아침마다 새로운 생명의 안목으로 세상과 삶과 자신과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장성해져가는 생명에게 하루하루는 늘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란다는 것은 더 십자가의 삶이 자신을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제보다, 또 단 하루의 과정에 비교되는 덜 장성한 생명보다 더 낮아지고, 자신이 좀 더 수고하고, 더 속상해하는 자리로 갔다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더 낮아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분을 내고 화를 낼 일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어제 화를 내었던 것이 오늘은 화를 낼 일이 아닌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엎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는 말 그대로 고분고분한 모습으로 순종하심과 같은 것입니다.(이것은 예수님께서 자라셨다는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변하는 단계를 보이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사람이 분을 내는 것은 그 자체가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 분을 내느냐가 문제이고, 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분을 낸다고 해도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넘어서지 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 했습니다. 이것을 다시 이야기하면 분을 내는 것은 사람이 가진 기본 본성의 하나라는 것이고, 본성이란 것은 억제하고 조절하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의를 가지고, 어떤 가치 세계에서 그 본성이 발현되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 가진 인생은 그 존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심히 좋은 것이라고 여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이 가진 모든 것들을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것은 그 본성들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분을 내는 것이나 반대로 사람이 누구나 사랑을 느끼는 것과 같이 사람이 가진 본성은 그 자체로 선과 악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을 사랑하는 본능도 사회적 불륜과 같이 사회를 헤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진 본성은 그 자체가 선과 악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본성이 어떤 생명 아래에 있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의가 훼손되는 것을 보고 분이 나지만 결국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충만해지면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훼손하는 사람들과 그 가치관 그리고 그 근원인 선악과에서 비롯된 의 앞에 자신이 죄인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하루하루 새롭게 될 때 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기에 그것이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장성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그리스도의 장성함과 그 충만함으로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이 바울 사도의 권면이 자기 삶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것, 그 노력을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포함한 삶은 자기 안에 없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안에 없기에 그것을 얻고 이루려 하지만,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자기 안에 있고 그 생명이 매일매일 자라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정리해 본다면 사람이 분을 내는 것은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을 내는 본성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 안에 있는 본성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다만 어떤 일로 그 본성이 드러나느냐의 문제로 죄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안에 무엇을 의로 삼고 있느냐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본성인 사람은 하나님의 일로 분을 낼 것이고, 선악과를 먹고 육신의 정욕을 좇아 자기 의가 본성인 사람은 육신의 일로 분을 낼 것입니다.


또한 설사 하나님의 일로 분을 낸다고 해도 그것을 인하여 죄, 곧 자기 정체성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를 훼방하는 사람도 하나님이 주인이지 내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 자리를 벗어나서 그것을 심판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서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십자가의 도가 더 충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이 하루하루 자라므로 새로운 날, 생명이 더 장성함으로 맞이하게 되는 또 다른 새 날이자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더 장성해진 날이 오면 자신은 더 낮아지고, 더 의로워진 만큼 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므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신의 삶을 이끄는 것을 보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바울 사도의 권면한 자리로 자신을 이끄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노력이나 훈련하지 않아도. 왜냐하면 이 모든 권면은 바울 사도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권면한 것이고,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우리, 곧 자신과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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