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잠깐 마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사람들은 마귀, 사탄, 귀신과 같이 구분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대응하는 법이 하나인데, 설사 그것이 정말로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마귀나 사탄에 대해서 잘 알든 모르든 다들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친다는 하나의 법만 아는데 그게 나누어진다고 소용이 없습니다. 영화나 만화처럼 퇴마를 다룬다면 또 모르겠지만.


앞서 마귀가 틈을 타는 것을 허락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을 이야기 하면서 마귀가 유혹하거나 노리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거듭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거듭남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같이 교회에 다니는 것이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시인하고 마음이 뜨거워진 그런 경험을 말하는 포괄적 개념이 아닙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생명이 새로 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은 다시 났는데 같은 것을 추구한다거나 같은 것을 먹을 것으로 또 귀하게 여기는 것도 같다면 새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바랬고, 자기 육신에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하늘이 도왔다고 말하며 살다가, 예수 믿은 다음에 동일한 것을 감사하고 추구하면서 그 대상을 하나님을 바꾼 것은 거듭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육신이 평안해지면 하나님께서 도우셨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자기 육신이 세상 가치관을 주장하는 사람의 주장 앞에 종이 되고 죄인이 되어 수고하게 되는 것을 스스로 보면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을 때 비로소 마귀가 노리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마귀의 행사입니다. 이는 늘 설명하는 것과 같이 인생이 받는 모든 마귀의 시험은 예수님이 받으신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마귀의 시험 뿐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보이시러 오신 분이니 그 분이 보이신 것과 다른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떠난 사람을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 즉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은 것이니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이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유혹이라는 것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으로 세상의 법칙들, 육신의 한계를 넘는 기적도 일으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니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은 마귀에게 넘어간 생각입니다. 혀 갈라지는 소리를 내면서 성령의 능력을 행한다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도 마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목사니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상을 차리는 것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니까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더 낫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렇게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생각과 일은 단순히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문제가 아닙니다.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일에 있어 귀하다는 가치가 세상의 가치에 기준을 두고 더 좋은 것, 세상의 가치가 더 선하게 여기는 것을 귀한 가치로 여기는 가치관은 세상의 생명을 가진 것이니 마귀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안에서 나오는 생각을 마귀의 유혹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안에 있는 마귀의 생명,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의와 가치관에서 나오는 생각을 괜히 마귀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마귀의 자녀인데 왜 마귀가 그를 유혹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닌데 자신들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그냥 자기 팀을 죽이는 팀킬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모순도 한 몫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그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기에 육신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것을 이기려고 성경대로 행합니다. 음란한 생각이 든다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여 난 것도 아닌 인생이고 육신인데, 그 육신에 깃든 본성이라고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 일리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는 의미입니다.


육신에 대한 자기 기준을 스스로 가지고 그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모습과, 그 부합되지 않는 모습을 추구하거나 끌려가는 것을 마귀의 유혹이라고, 사탄의 시험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마 웃지도 못할 코미디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고서 그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과 그 모습으로 끌려가는 것을 마귀의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 선악의 기준, 자신이 먹은 선악과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선악의 기준이 바로 뱀이 준 것이고 마귀 그 자체인데, 마귀의 생명을 가지고 살면서 그 삶에서 비롯되는 자아의 모습을 마귀의 유혹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물리치려고 하는 것은 고양이가 자기 꼬리를 물기 위해서 뺑뺑 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엄청 웃기고 노력하지만 이루기 힘들 뿐 아니라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자신을 헤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권면한 것은 자기 선악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유혹이라 여기는 마귀의 자손들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은 성도들, 거듭난 사람이요 신실한 사람이며, 십자가의 도를 아는 사람들에게 마귀의 유혹을 경계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이란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세상의 가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유혹은 하나님은 너무 존귀한 분이고, 그렇기에 그 아들 또한 너무 존귀한 존재이기에 그 존귀함에 맞는 대우를 하려고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대접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유혹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적어도 성경을 몸으로 다 지켜낼 수 있어야 하고, 육신은 초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초인적이어야 하며,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섬겨서 세상의 영광을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유혹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 마귀의 유혹은 십자가의 도를 알면 알수록 사실 더 깊이 빠지는 유혹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단들은 그 시작이 지금의 교회들보다 다 성경에 대하여 더 깊음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는 이 수준 낮은 일반 교회들보다 성경에 대하여 더 깊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더 깊고 더 밝은 것을 대함에 있어 세상적인 가치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세상과 섞이면 안 된다고 스스로 사회에서 분리하거나 격리하면서 타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성과입니다. 스스로 가진 자기 선악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마귀의 유혹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은 마귀도 상대도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이미 마귀의 자녀가 되어 있는데 그것을 유혹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깊이 알면 알수록 이것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집니다. 모든 교회들과 신학자들이 보는 성경이 어두운 것을 알고 밝은 안목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것을 가진 자신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귀함은 오히려 낮아지고 죄인 되고 종이 되기에 귀한 것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은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배우지 않았다고 말씀하심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바로 알고 나서 그 존귀함을 알았으니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자신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세상에 없는 존귀함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도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정작 세상에서 낮아지고,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종과 같이 전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선택의 자유와 의지에 따라 자기 양심에 찔림을 받아 스스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 귀한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본분이 그것임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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