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을 낸다는 것, 일반적인 말로 화를 낸다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큰 올무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성경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화를 내어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화를 내지 말라는 말씀이라기보다, 화를 내므로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말하면 화는 내도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잊지 말아야하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 육신을 하나님께서 조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정신과 감정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화를 내는 본성을 인간 본성 안에 넣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핑계를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부정하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보이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것, 인간이 가진 육신의 삶에 대한 견해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을 가진 인생을 부정하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아들도 동일한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 차이가 육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생각과 영지주의의 뿌리이기도 합니다.(그 두 가지는 뿌리가 같습니다.)


사람은 분을 내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도 얼마나 많은 순간 사람들을 향하여 진노하셨는지 세기도 힘듭니다. 문제는 무엇을 인하여 화를 내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으신 것은 분명히 큰 분노를 인함인데 그것은 하나님 의에 관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훼손당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즉 화를 내는 본성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본성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화를 내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과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을 즐기는 것을 보고 화는 내는지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화를 내는 본성이 죄가 아니라, 자신의 의를 주장하기 위하여 화를 내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를 다시 이야기 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정체성, 창조의 목적을 벗어난 상태 그 자체가 바로 죕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다르게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 산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일에 당연히 화가 나고 분한 마음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고도 화도 나지 않고, 그것을 떠나야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을 힘껏 조롱하고 모욕을 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골리앗의 소리에 무서워하느라 화가 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두려운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들렸고 두려움이 아니라 화가 났던 것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육신의 일이 잘못될까 하여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진리가 없음을 알고도 두려워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다면 진리 없는 교회에 앉아 있는 것이 화가 날 일인데, 오히려 세상에서 살면서 서로 옳다고 주장하면서 화를 내는 것만 걱정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어도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이것을 넘어선 사람이 바로 모세와 사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를 향하여 화를 내었다고 그들을 그 자리에서 심판하신 것이 아닙니다. 벌을 주어 죽게 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다윗이 사울을 대한 태도가 바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는 모습의 표본적인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사람을 때리거나 삶을 구속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부담을 주는 것까지 포함하면 거의 일상에 가깝습니다. 교회에서 가고자 하는 방향에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가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이라 하고, 불을 던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내시면서 전하는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 집에서 나와서 신발을 털고 가던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듣고 따르지 않는다고 집에 불을 지르듯이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종교들이 종교적 신념에 맞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육신의 삶을 구속합니다. 그런 것은 의가 애초부터 어긋난 것이기도 한데, 그것에 화를 내고서 자기들이 가진 죄의 개념, 행위로 범하는 죄까지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자기 안에 아무리 하나님의 의가 온전하고 그것을 인하여 화가 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대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자리를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거룩하신 의가 훼손되면 화를 내시는 분이시니 그 본성이 자기 안에 있다면 화가 나는 것까지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자신이 창조하신 않은 사람과 세상의 일에 자기 안에 있는 의, 그것이 설사 하나님의 의라고 하더라도 그 의를 주장하여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 뿐 아니라 성경의 일관된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의가 조롱 받으면 화가 나고 처음에는 그것을 인하여 죄를 범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어린아이 때의 일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권면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자신에게 분이 일어나도 이상하게 자신도 모르게 다시 십자가의 도에 매여 죄인과 종이 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는 지경은 장성한 사람들, 그리스도의 분량이 이 자리에까지 이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충만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자신이 살게 되는 것은 연습이나 훈련이나 공부로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단언컨대 어느 날 그렇게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므로 이 말씀이 자신이 것이 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라서 사춘기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성품과 정체성은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생명이고 본성이기에 그것이 장성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생명이 자라서 스스로 알게 되듯 함이 아니라면 이 말씀은 지킬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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