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에서 이방인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 이방인은 육체의 할례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를 기준으로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가치 기준에 의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냐 아니냐는 기준은 분명히 교회에 다니느냐 아니냐의 문제와 다른 것입니다. 교리문답이나 교리에 의한 세례를 받았느냐 아니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 생명의 본성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와 동일한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 아들의 성품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생명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은 아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더 수월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닌데 스스로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기는 해도, 교회에 다닌다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군복을 입어 군인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생명의 법이기 때문에 삶으로 그 생명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라고 인식하는 그 삶이기도 합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이 속사람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같이 천국에 가려는 목적이나, 삶에서 흉사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나 혹은 육신의 삶에서의 복락을 담보받기 위해서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면 예수님과 믿고 순종하는 사람 둘 중에 누가 유익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문자로 질문을 만들어 놓고 보면 그래도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대부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바램이나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의 바램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단지 그 바라는 바를 하나님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경우가 태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에 그 영을 표현할 형상이 필요하셔서 사람을 만들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표현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고,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서 육신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 육신이 성공하고 평안해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식의 적반하장격의 신앙을 좋은 신앙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바로 이방인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곧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바라는 바가 모두 육신의 형통과 복락과 안녕과 성공이라는 프레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경쟁 속에서 피라미드의 위로 올라갈수록 그 바라는 바가 담보된다고 믿기에 그것을 위해서 육신으로 노력하고, 육신의 힘을 넘는 도움을 신께 바라면서, 그 신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경전을 육신으로 지키려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서 의로워진다는 것이 바로 그 목적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얻든 다른 신이나 자기 육신의 힘으로 얻든 육신은 세월을 따라 약해지고 누구나 다 죽게 됩니다. 그것은 육신이란 분명히 소비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육신이 영화롭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은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것입니다. 그런 육신의 성공과 안녕과 복락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종이컵에 귀한 포도주를 보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안녕과 복락과 성공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노라하면서 성경을 지키려 하는 것과 같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허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이니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완전히 허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속사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 생명의 본성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삶입니다. 그 삶에 있어 육신은 성공하고 복락을 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도구이자 선물입니다. 육신을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과 육신의 복락을 추구하는 사람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 생각을 이루어주는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이 꿈꾸는 모든 것에 대하여 성경은 정말로 허망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것이고, 전도자의 말과 잠언이 대표적입니다. 결국 바울 사도가 이방인의 허망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육신의 정욕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본질을 육신에 두기에 이방인의 구분도 육신에 두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 주시는지 벌을 주시는지도 육신의 어떠함으로 판단합니다. 그런 기준으로 하면 예수님이나 순교자들과 사도들은 다 벌 받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간구, 자기 안에 있기에 사랑하는 성도들도 함께하기를 구한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삶은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바램으로, 또 부자 되고 성공하고 평안한 삶을 살고자 하는 목적을 인하여 추구하는 착하고 성경대로 사는 삶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인하여 본성에 이끌려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되는 삶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속하지 않은 삶은 이방인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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