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장에서 ‘교회는 제도와 건물을 세우고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세워지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가 세워지는 법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법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는 정말로 찾기 어렵습니다. 어디 숨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와 건물이 있어야 교회라는 안목으로 보니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빨간색 물건인데 스스로 파란색이라고 생각하면서 찾으면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기에 그 생명이 장성하여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것, 그리고 그 장성함은 연명하듯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이 충만하여 자라는 것은 개인에게 영광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이 만나면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라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바울 사도만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유명한 구절,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라고 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모이면 그곳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이 모였다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 그 자체가 그리스도이니 그들이 모인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이 함께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드락 메삿 아벳느고가 풀무불 안에 던져졌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 불에 던져지니 바람 같이 누군가 나타나서 불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불에 던져진 사람은 세 사람인데 안에서 춤추는 실루엣은 네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 그것이 이미 하나님께서, 또 그리스도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a apple을 모아두면 이미 그 무더기에는 the Apple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하여 우리는 정말로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모이니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목사 라이센스를 가진 자가 건물을 마련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사람을 모아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은 교회에 대한 이 개념만 독립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교회를 인식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성품이 충만하고 장성하여지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모여서 교회가 되고, 그런 사람이 가진 생명의 안목이 있어야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므로 세워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고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모든 것에 앞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장성하여 지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세워지는 것은 또 다른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라는 머리 아래 있는 지체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순종되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근본인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이기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동일하기에 서로를 용납함에 거부감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당번이 있습니다. 나름의 법이 또 있습니다. 규칙이나 당번이나 법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어떤 수고와 손해를 서로 보려하지 않기 때문에 강제하는 것입니다. 나만 수고하기 싫고, 나만 손해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은 천국에 같이 가야한다거나, 혼자 다 하는 것이 옳지 않고 부담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회칠입니다. 무덤에 칠한 회칠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예사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정말로 온전히 교회의 정체성으로 순종하는 교회는 단언컨대 법과 규칙과 당번을 정하여 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이끌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서로하려고 해서 당번을 정한다면 모를까. 우리 몸에 있는 어떤 세포나 지체도 머리로 대표되는 유전자의 다스림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이 체계가 무너지면 자가 면역질환(스스로 자기 몸을 공격하는)이 되거나 남의 장기를 이식 받은 사람처럼 거부반응을 줄이기 위하여 면역억제제를 먹어야 합니다. 교회에 서로 하지 않으려 하니 봉사 당번을 정한다는 것이 바로 그 면역억제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는 같은 유전자를 가진 몸과 같다는 것입니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정상적인 몸 안에서 서로의 몸을 공격하는 일은 없습니다. 왼손과 오른손이 당번을 정하여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다툼이 끊이질 않고, 심지어 강등과 문제가 없는 교회가 있을 수 있느냐는 말까지 합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런 곳은 제 아무리 번듯해보여도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교회라고 하겠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을 때 발생하는 수고를 해소할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으니 제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 당회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서 육신이 모이므로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육신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이 발생합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먹여야 하니 먹을 것을 준비해야하고, 먹고 나면 치워야 합니다. 여기서 육신의 수고가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 수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바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교회냐, 아니면 세상의 제도 아래 있는 교회냐를 결정합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 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였으면 믿음이 더 좋은 사람이 육신의 문제를 수고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교회가 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바로 그것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속임수며 세상의 교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대접받고, 장로가 상석에 앉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세워진 참교회가 아니라 목사와 건물을 마련하여 사람을 모은 세상의 교회, 우리가 아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육신의 수고도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속임수와 교훈에 따라 처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자 모였으니 하나님을 더 아는 자가 육신의 수고를 덜 하는 제도를 만들고, 당번을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 아들이라는 본성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십자가는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된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품이 장서하면 장성할수록 천해지고 낮아지며, 육신의 수고를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더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다스림을 받으니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머리의 지시에 따르는 연합된 몸으로 서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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