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1-16) 세상에 있는 교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7. 3. 05:00 Writer : 김홍덕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해지는 것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속임수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람의 속임수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앞서 사람의 속임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한 속임이라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속이는 사람의 세계에 빠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이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 사도는 (세상의) 교훈도 간사한 속임수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세계에 있는 교훈이라는 것도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세상의 철학과 학문을 초등한 것으로 정의를 내린 적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세계에는 참 유용하고 놀라운 지식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는 사람을 참으로 선하게 이끌고 참되게 하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 과감하게 정리한다면 그 모든 것은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기 전 하나님의 아들들이 반한 세상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결합되어 네피림이란 장수들이 나왔지만 그것은 결국 홍수라는 대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홍수가 날 때에 성경은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 7:11)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땅 깊은 곳에 있는 물들이 터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아 하나가 된 것을 인하여 난 홍수는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하여 넘쳐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이란 갈급함을 해갈하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사람이 알고자 하는 것을 채우는 것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말씀은 늘 물로 대변됩니다.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쳐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에게서 난 지식과 교훈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은 것과 같이. 그랬더니 네피림과 같은 큰 장수가 나오더니 물도 큰 물이 넘쳐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둘 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궤도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갈증, 말씀과 지식과 교훈에 대한 갈증을 해갈할 것 같은 물이 넘쳐나는데 정작 사람들은 그 물로 인하여 심판 받고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서 나는 지식과 교훈, 흙으로 창조된 사람이기에 땅에서 나는 것이라고도 표현되는 그 교훈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분명히 갈라놓았습니다.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갈라놓으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합하여지면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간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고 보면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세상의 지식을 엄청나게 이용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결과 매머드급 교회가 나오기도 합니다. 네피림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삶이라는 딸들의 아름다움을 교회에 가져와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혼인시켰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고, 그것을 미끼로 사람들을 모으니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큰 교회가 생기고 모든 교회가 그렇게 큰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세상의 교훈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에 대하여, 세상에서 성공하는 가치에 대하여, 세상에서 성공하는 선함과 도덕적 행실에 대하여 교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충만해진 사람은 그것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교훈, 과학과 철학과 사람을 선하게 하는 많은 교훈들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장성하고 많은 것이 하나님 아들의 덕목이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아들(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욕을 하면 안 되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수 있는 성공과 세상 사람들보다 청렴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그 교훈은 바로 사람의 궤술이고 간사한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와 같은 말입니다.


특히 이 중에서 사람의 선함에 대하여는 아주 혼돈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간사한 속임수라면 하나님의 아들은 입에 욕을 달고 다니면 행패 부리며 법을 무시하는 사람이어야 하느냐는 반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많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저는 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본성이 되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의 아들이 도둑질이나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도둑질하라고 되어 있다는 말인가? 라고.


사람이 말을 선하게 하고 행실을 도덕적으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욕을 많이 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호통이 한국의 일상적인 X새끼라는 욕과 동일한 수준이라고도 합니다. 말도 엄청 험하게 하셨습니다. 종교와 정치가 하나인 사회에서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이 없는 험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함과 도덕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우리는 세상의 교훈을 지켜서 하나님의 아들다워진다는 교훈은 사람의 궤술이고 간사한 속임수와 동급인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본성이 되어 그 생명의 장성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의 대척점에 있는 것들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장성함과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세상에 있는 교훈은 분명히 사람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 교훈들도 다 하나님의 경영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거나, 더 나은 신앙이 된다고 하는 교훈은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과 반대편에 있는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것일 수 있지만 속 심령에 그리스도의 장성함이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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