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1-16) 자라는 생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7. 4. 07:37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한 개인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신 것도 이러한 이치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하심은 이 세상에서 오직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에게 하실 말씀이 있고,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표현하고 보이시려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의외로 그 믿음의 결론이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은 노력하는 것이지 이생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서나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들이란 존재는 아들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 노력하는 것은 없습니다. 또한 사람으로 나면 그 난 육신이 자라는 것이지 태어난 다음에 무언가를 더 붙이거나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고 신앙고백을 한다면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과 같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와 신앙 안에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가치관은 보편적 상식이 되어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지나서 이것을 부인하면 이단이 되거나 신앙 없는 이단아가 되기 일쑤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사람들의 이러한 어리석음에 대비라도 된 듯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큰 속임수입니다.


이것이 속임수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능력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40일 금식기도한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기도해서 능력을 행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의 현상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더 가깝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에 가깝다는 것은 그 방향의 아득한 곳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시험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적을 행하는 초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돌과 같은 율법도 다 지킬 수 있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상하지 않으며, 또 그것을 행하는 이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는 자를 섬기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귀의 생각이 오늘날은 사람이 예수님이 될 수 없고 단지 노력할 뿐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기적적인 존재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서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속인다는 것입니다. 이 속임수는 사실 모든 사도들이 목숨을 바쳐서 다투고 바로잡으려고 한 생각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을 이기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면 그런 속임수를 이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이 속임수는 세상에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속임수와 궤술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속임수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여정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최종 목표도 아니라 시작점이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이 땅에서 보이신 것은 예수님(the Christ)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존재가 그리스도가 되게 하려 하심인데, 자신(a christ)이 그리스도는 될 수 없고 노력할 뿐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보내신 자를 믿고 안다는 것은 결국 보내신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함입니다. 즉 거듭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나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자기 힘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려 노력하다가, 거듭난 뒤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서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는 것은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본성은 같고, 인생의 목적과 추구하는 바가 같은 것입니다. 단지 도구만 바뀌었을 뿐.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은 결국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 육신은 의학적으로 살아 있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 안에서 보면 죽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장성한 분량’, ‘그에게까지 자란다.’와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안에서 밖으로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밖에다 덕지덕지 붙입니다. 공로를 쌓고 가진 것을 드리는 행위를 쌓아 올리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자랍니다. 바울 사도가 간구가 이루어진 모습을 설명함에 있어 자라고, 충만해지고, 장성해진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생명이고, 그 생명이 자라는 것을 자신이 체휼했기 때문입니다. 체휼했기에 자기 안에 있고, 자기 안에 있으니 간구했고, 자기 안에 있기에 그 간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나서 어른이 되면 자신이 자란 것을 알고, 또 어른이 되는 과정을 자녀와 어린 아이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생명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생명은 그 창조하신 목적이 이루어진 사람이고, 그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진 모습을 처음으로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종합적으로 보이신 자리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가 정의를 내린 하나님 아들과는 반대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생명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여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법과 의로 볼 때 죽어야 할 정도의 죄인이었습니다. 본질은 아니지만 그런 심판을 예수님께서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신앙으로서의 결백을 주장하려 발버둥치는 모습과 상반된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기에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함을 이끄는 생명의 정체성을 속이는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속임수와 세상의 교훈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본질상 마귀와 같은 가치관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없는 삶입니다. 거듭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으니 장성함도, 자람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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