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장성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로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이 단지 유혹을 이기기 위함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위함임을 앞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언뜻 그리스도로 장성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간사함을 이기기 위함이라는 다소 단순해 보이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 이면에는 본질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사람의 궤술 곧 사람의 간사한 속임수와 같은 것을 이긴다는 것은 사람이 속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함과 대칭이 된다는 것은 나름 급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라 근원적인 속임수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자신을 속이는 것은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4장 후반에 가서 ‘유혹’이라는 것과 ‘마귀가 틈을 노리는 것’과 같은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궤를 같이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 바울 사도의 이 권면이 어떤 궤도 위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아들에 대하여 간사한 유혹과 속임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것의 대척점에 있는 속임수는 당연히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임의 주체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속임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아들에 대한 속임수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마귀라는 것도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의 성격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생각이 바로 마귀가 된다는 것에서 4장 후반에 나오는 마귀가 노리는 틈이라는 것도 역시 하나님 아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 바로 마귀가 노리는 틈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생각이 사람을 마귀로 만들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사람의 궤술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험을 생각해보면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 시험의 공통분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마귀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마귀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아들은 돌이 떡에 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돌은 율법이고 떡은 사람과 하나가 되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날도 성경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하지만 성경은 자신의 노력이나 신념으로 지킬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이라고 해도 그것을 지켜서 의로워진다는 생각으로 지키려 하면 다 돌입니다. 그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듯 신약이든 구약이든 사람의 신념으로는 지킬 수 없습니다. 즉 돌이 떡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다고 마귀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그 자체가 마귀와 같은 존재입니다. 마귀나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이나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것은 동일합니다. 특히 사람이 육신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뜻하신 의와 상반되는 것이니 그 생각을 가진 사람 그 자체가 마귀고 사탄인 것입니다. 알고 보면 마귀는 영적 세계에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속이는 주체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다른 시험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기적을 일으키고 초인간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바로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아도 예수를 잘 믿어서 성령이 임하시면 초인적인 능력을 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좋은 신앙이라는 식의 생각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시험이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사람의 궤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을 시험한 시험은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마귀에게 절하는 것인데, 이것을 풀어보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으려면 돌로 떡을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가진 마귀에게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즉 마귀가 가진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경배하면 천하의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이 빠져있지만 스스로 이 시험에 빠진 것도 모르고 자신이 마귀를 경배하고 있는 마귀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도 모르는 시험입니다. 바로 세상에서의 영광과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그 보편화된 신앙이 바로 이 시험인데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보면 사람의 궤술과 속임수 그리고 마귀가 노리는 틈과 유혹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속이고, 유혹하며 그 틈을 노리는 것이 바로 사람의 궤술이고 간사한 속임수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함의 대척점에 있는 가치관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시고 육신으로 천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었는데,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으면 기도로 사람의 병이 낫고, 성경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육신의 정욕이 추구하는 세상의 성공을 주시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의 생각이요 사람의 궤술이자 간사한 속임수며 마귀의 유혹에 빠져 마귀를 경배하는 것인데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속임수와 마귀의 유혹은 그것을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링에 올라간다는 것은 이미 같은 종목, 같은 체급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에게 천군 천사가 대응하지 않은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이기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그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장성하고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물러가라 외치고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한 줄기 빛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장성해지는 것이 하나님 아들과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속이고 유혹하는 사람의 궤술과 마귀의 유혹과 간사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속임수와 유혹을 이기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어두움과 무관하게 빛이 되는 것입니다. 빛이 되면 어두움은 자연히 물리치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가장 온전한 이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상함에 이르면 사람의 육신에서 비롯된 육신의 정욕과 마귀의 유혹은 이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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