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3:1-13) 믿음과 담대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6. 10. 06:00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은 믿음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신념이나 내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가진 의가 나의 것이 되도록 내어 주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아들을 믿는다고 할 때는 아들이 엄마의 생각대로 된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아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잘 개척할 것이라는 믿기에 아들을 뒷바라지 하겠다는 의미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들은 상당히 능동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하나님을 위한 마음이 성취돌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논리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양심적이어도 그것은 협박, 아무리 좋게 봐도 협상이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형편이나 삶이 어떻게 되더라도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의 조건이나 사족을 다는 것은 다 간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더 할 나위 없는 죄인들이 처형당하는 십자가에 달리는 것도 순종했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의 어리석음이 없는 것인데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단면입니다.


특히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는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생각이 같아야 가능한 것이라고 앞선 포스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자신에게 순종된 사람, 즉 하늘의 뜻이 흙인 자신에게 이루어진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만이 하나님과 생각이 같기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는 너무 기초적일 것 같아서 간과하기 쉬운 명제에 대하여 고찰하고 자신을 반추하여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 그것이 자기 생각에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을 아는 것도, 이방인이냐 아니냐의 구분도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그 믿음을 가졌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의 여부로 구분이 된다고 말씀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 교회가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을 알게 되는 이 모든 것이 예정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운명을 예정하시는 것 따로, 비밀에 대하여 따로, 교회에 대한 것 또 따로 이렇게 하나씩 예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서 다룬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목적 하나, 그 예정하심 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연결하여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이시고, 우리가 순종하여 믿기를 바라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 하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어야 하는 예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나 비밀도, 교회의 정체성과 그 안의 경륜과 지혜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 하나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결국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왜 인생을 주셨는지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을 왜 주셨는지의 문제라는 것을 그렇게 집요하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미 주어진 육신이기에 그냥 육신을 본질로 보고서 그 육신이 어떻게 행할지(Do)에 대하여 자기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하여 자기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어두움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또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정말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것이 ‘나타나다’는 의미인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창조 목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목적이 육신이나 형상을 가진 상태로 나타난 것이 피조물이고, 그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형상을 나타내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게 되면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첫 번째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나타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창조의 목적이자, 하나님 경륜의 비밀이자,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그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 믿음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십자가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이 세상 가치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을 기도하고 바라면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어두운 것이며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어둡고 자기 생각을 하나님께 가려고 하니 담대히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 나타내신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오히려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만 생각하면 늘 두려운 것입니다. 혹시 뭔가를 잘못해서 불행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이신 대로 십자가를 보고서 자신의 존재 목적이 세상의 가치 앞에서 육신이 종과 죄인과 같이 드려지고 소비되므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그 온전한 믿음 안에 있다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있으니 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나아감에 항상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과 담대함의 본질적 인과관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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