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3:1-13) 바울 사도의 환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6. 11. 05:00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자 신실한 성도들이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보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담대함이 있으니 자신이 당하고 있는 환난을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가 겪는 고난이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 이어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위한 간구를 이어갑니다.


신앙 안에서 환난이나 고난은 축복에 대한 지불로 여겨집니다. 고난이 닥치면 참아야 하는 이유가 고작 견디면 복을 주신다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복에는 신앙의 성장이라는 나름 고상한 것도 있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 육신의 복락과 세상의 성공입니다. 그것이 단지 호의호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환경으로의 전환이라고 회칠을 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의 정욕을 추구했다는 무덤을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이 블로그 욥기를 통해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먼저는 육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육신이 겪는 모든 일입니다. 육신은 사용한다는 것이 정말로 번거롭고 귀찮으며 또 약해지고 힘듭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것을 종들에게 시켰고 이제는 신분이 아니라 권력이나 재력으로 남을 시킬 수 있는 자리에 가서 자기 육신을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것을 성취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육신이 사용되는 것을 터부시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그 생각이 옳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오히려 의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지금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이 곤고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성도들에게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러 가시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이 제자들(성도들)에게 주셨다고 하셨는데 그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삶,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언제나 육신이 곤고해지는 것입니다. 육신을 사용하지 않고 입만 나불거리면서 복음을 전할 수 없는데, 이는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가 바로 그것에 소비하고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육신이 평안하기 원합니다. 어떻게든 더 누워있기 원하고 몸을 움직이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기 원합니다. 심지어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하늘에서 말로만 하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고난입니다. 십자가가 가장 큰 고난인데,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더 이상의 하나님 성품이 나타낼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의 사건인 것이 그것입니다. 육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육신을 사용하는 것을 천한 종의 일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당연히 고난이고, 천한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장 큰 이유가, 자신들과 같은 육신, 아니 자신들보다 못한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인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 육신의 정욕과 안목으로 보면 그것은 말 그대로 고난이고 환난입니다. 십자가 보다 더한 환난이 사람에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성도들에게 자신이 겪는 고난이 오히려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하신 것은 육신을 가지고 수고하여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과 영광에 대한 온전한 견해인 것입니다. 고난은 육신의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육신의 수고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수고도 신념으로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작심하여 선교사가 되거나 목사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어디까지나 속에 있는 본성을 좇아 소비되는 존재이지 신념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은 속에 있는 것이 표현되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하여 신념을 가지고 도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곧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었고 그것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념이나 의지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아 살 뿐인데 그 모습이 육신의 정욕을 좇는 이들에게는 고난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에게는 영광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만 알아도 고난을 견디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라는 헛소리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난의 삶을 산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가만히 두어도 세월과 함께 곤고해집니다. 시간 속에서 어차피 약해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편으로 절대적인 소비재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다만 무엇을 위하여 소비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그것이 창조주의 뜻을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입니다. 그 뜻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이끄는 본성대로 살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기 안에서도 공명이 일어나서 아는 정도가 아니면 아직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본성이 자기 삶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끌고 가는 것을 스스로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 삶이 육신의 정욕 가운데 있는 자들이 보면 원대로 살지 않는 것 같고, 육신이 피곤한 삶을 사는 것 같아서 고난으로 여겨지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보면 그것은 영광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영광으로 여겨야 합니다.’와 같은 소리를 하면 웃기는 것입니다. 여겨야 한다고 다짐한다는 것은 아직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환난이 영광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이기에 성도들에게 이것이 영광이라고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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