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이라는 것은 육체의 기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것에 이어진 그리스도의 비밀에 관한 말씀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복음이고,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비밀이라는 말씀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만남과 공동체이므로 비밀이 복음이 된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그 안에는 하나님의 경륜과 지혜가 넘치게 된다고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는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된 바울이 이방인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비밀이 자신의 생명과 본성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것이 자기 안에 열리지 않은 사람들이 아무런 고찰 없이 교회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진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것에 있어 담대함이 있는 반면 두렵고 경외하는 마음이 공존하는데 이것에 대하여 명확하게 자기 안에서 깨달아지는 바가 없다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감을 얻는다는 것을 그냥 자기 이야기로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감을 얻는다는 것은 두려운 하나님께 나아가도 죽지 않을 존재일 때의 이야기지,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그것은 죽으러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고서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는 하나님이나 누가 “왜 부끄럽게 벗고 다니느냐?”라고 한 적이 없음에도 스스로 벗은 것을 알고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큰 변화는 벗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다니던 하나님 낯을 피해서 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담대함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아담의 눈이 밝아졌는데 담대함이 사라지고 숨었다는 것입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더 잘 보인다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두려움은 보이는 만큼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보다 밝은 곳에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눈이 밝아졌는데 오히려 자신을 감추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눈이 더 밝아졌는데 하나님이 두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 같지만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밝아지고 더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두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에 어떤 것을 더 밝히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엄청 두려워합니다. 행여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까 싶어 성경을 지키려는 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주는 ‘아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의 평안이 손상당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눈이 밝아져서 깨달은 것은 자신이 벗었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보니 하나님 앞에 자신은 벗은 자와 같고 그대로 가면 죽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는 다름 아닌 유대인의 나무, 곧 율법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즉 사람이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가기에 부족하다고 여기면 율법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가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먼저 회개부터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부족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선악의 기준이 충족되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들 중에 그 누구도 이때까지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위로 의롭게 될 인생이 없다고. 즉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항상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두려움은 자기 선악의 기준이 밝아져서,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에 대하여 너무 잘 알기에 하나님이 만드시고 심히 좋다고 하신 육신을 가진 인생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 부정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 앞에서 숨었다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육신을 보는 기준과 사람이 육신을 보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 두려움입니다. 서로 육신에 대한 정체성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신을 보전하고 평안하게 되는 것이 성공과 복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보내신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그 뜻이 이루어졌다고 여기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과 자신의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하나님이 두렵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라도 서로 만나려면 정체성의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른데 만나면 두려운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육신 가진 인생에 대한 생각과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보는 가치관이 같으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언제나 담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더가 아하수에르 왕에게 나아갈 때와 같은 것입니다. 왕의 생각이 다를 때 왕에게 가면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에 대하여 가지신 생각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육신의 본성이 된 사람은 별도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표현조차 어색한 것입니다. 그의 행사 전부가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니 그것보다 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담과 같이 육신이 부정하다고 여겨 육신을 정결케 되도록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는 끝없고 성공할 수 없는 노력에 삶을 바친 어두운 인생이자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이방인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항상 두려워서 뭔가를 준비해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늘 여깁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사람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공로로 자신을 치장해야만 나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담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두운 인생들이 말하는 담대함은 하나님의 향하여가 아니라 반대인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뒤에 하나님이 계시니 담대히 나아가자는 의미가 더 큽니다. 그렇게 담대히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부정하게 보지만 또한 본질로 보기에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주신다고 믿는 것을 담대함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정체성에 맞게 육신의 꿈, 육신의 정욕이 이루어지는 것에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일 뿐 하나님을 믿는 것도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