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사한다는 것을 알고 믿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작용과 법으로 죄를 사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려고 하니, 시간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대신할 죄가 예수님 십자가 사건 뒤에도 계속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앙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미래의 죄까지 다 사했다고 하는 것은 금방 이해가 어렵습니다. 근간이라는 것이 아직도 해결도 되지 않는 상태인데 그 위에 신앙의 여러 가지를 쌓고 있습니다.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인지, 성숙한 신앙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대신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온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시인하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요한사도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그 사실 하나로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도 죄가 사하여 진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표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공장에 가면 제품의 표준이 되는 ‘한도견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품의 표본이라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제품을 한도견본과 비교해서 동일하면 양품 혹은 불량(불량의 한도견본도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신 분,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분께서 세상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죽으시는 사건 자체가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와 육신이 어떻게 소비되어야 하는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육신을 가진 자신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생의 목적대로 살지 않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게 하신 것이 십자가의 사건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한다는 것은 신앙 안에서 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모든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고, 또 그렇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신앙이나 세상이나 모두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어떻게 해야 그것을 이룰 것인지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합니다. 강연을 들으러 가고, 책을 사 봅니다. 그리고 시도해 봅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에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허무하다는 것은 인생을 바친 자기 삶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만족이 있다면 그것이 더 불행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해소하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 법을 정한 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목적을 위해, 죽어서 천국에 가려는 목적을 위해 어떻게 지킬 것인지를 궁리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의문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 율법이고, 주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면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라는 말씀도, 기도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기도하는 삶이어야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주일이든 안식일이든 하루를 살아감에 있어 하나님의 안식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날그날이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 복음이 바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이 자기 생명이 되었을 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에 순종하였더니 그것이 자신의 본성이 되어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해도 그 목적이 생명이 되어 나타나는 본성대로 사는 것을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게 된 상태가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존재 목적을 깨닫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을 행동으로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고 또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의문에 쌓인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그 의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 앞에서 오히려 죄인이 되어 육신을 종과 같이 섬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요 인생의 목적이라는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과 같고 종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임을 보이신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가치관으로 보면 육신을 덜 소비하고 평안한 상태가 되어 그 평안함과 육신의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교회에 가서 봉사하고 선교 활동하는 것이 선하고 의로운 것이고, 육신에게 험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이 무엇을 해아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낳고, 또 기도하라는 말씀조차 그렇게 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 곧 율법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세상에서의 성공을 가치로 여기는 법으로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너 같은 목수의 아들,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라는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셔서 지신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는 삶, 곧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 남들이 평안하게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세상에서 성공이고 선한 것이라고 바랄 때, 육신으로 종과 같이 더 섬기는 삶을 사는 삶이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십자가에 육신을 드림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좇아서 살다보니 그 성공을 담보하기 위하여 ‘하여야 하는 것’ 곧 율법이 너무 많고, 그것을 어떻게 잘 지켜야 하는지 의문도 너무 많았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자신이 추구하던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이 추구해야할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시인하는 사람의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사하여 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가치관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의문의 율법이라는 것을 고백하는데 다시 하나님의 의로 죄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의가 자기 생명이 되어 이전에 어떻게 지켜야할지 의문 그 자체였던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의 본성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자기 안에 구원이 있다는 것과 생명이 있다는 것은 물론 성경의 모든 것이 자기 삶을 보증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는 의문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본성으로 지켜지는 것을 어떻게 지킬지 공부하거나 의문스러워할 이유는 고사하고 방법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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