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허무신 막힌 담은 그리스도 안과 밖으로 구분하는 담이라는 것을 먼저 글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담을 허물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사람을 향한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면 그리스도라는 생명 세계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이나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다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밖에 있었다는 것이 이스라엘 영토 밖에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애굽에서의 노예생활 기간과 출애굽 기간 동안에는 영토가 없었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하게 그리스도 박에 있었다는 것은 교회 밖이나 신앙 밖에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한 알의 사과가 사과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양이나 크기나 색깔이나 심지어 맛도 다르지만 사과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이스라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의 본성을 가졌다는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본성이 다스리는 것과 의가 다스리는 것 그것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게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의와 하나님이 주신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혈통으로 할례를 받았든 그것이 아니든 또 삶이 초라하든 어떻든 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 이스라엘 밖에 있었다는 것도 분명해 집니다. 안이 어딘지 알면 그곳에 있지 않으면 밖인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도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이방인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유대인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육신의 할례나, 교리에 의한 교회에 주기적으로 출석하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 된 것은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원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의문에 쌓인 율법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문에 쌓인 것을 율법과 같이 지키려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계명 자체를 율법 혹은 복음이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어떤 말씀, 그것이 신약이든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해도 그것의 의는 모른 체 지켜야 한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지키려고 하면 율법인 것입니다. 신념이라 함은 자기 안에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하는 모든 것입니다. 


반대로 복음과 그리스도 안에서는 본성이 되었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서 하지 않으려 해도 하게 되는 것이 복음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신구약 불문, 상황 불문, 육신의 삶과 상태를 불문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본성에 끌리는 대로 살 뿐인데 모든 말씀을 지키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는 것, 그것이 모든 하나님 말씀의 의도요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순종하므로 그 뜻이 자기 안에서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생명이 되어 본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이고 구원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육신이 피를 흘리며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육체로 허문 담은 바로 인생이 자기 목적을 알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지 못하는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지 못하니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벽을 허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벽의 다른 이름은 바로 의문에 쌓인 율법인 것입니다.


의문에 쌓인 율법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교리로 또 성경공부에서 가르치지만 해 보면 되지 않아서 또 다른 답이 필요한 모든 관점들 그것입니다. 그 관점들이 육신으로 노력해보면 되지 않는 이유의 공통점은 모두 신념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해야 한다.” 아니면 “~~하면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해야 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은 또 이유가 있습니다. 심지어 계명 자체가 목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주 혹은 매일 같이 교회에 가서 듣고서 행하여 보려고 해도 또 하다보면 안 되기 일쑤인 계명들, 신념으로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지키려는 그것들은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노력해야 되는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완벽하게 되는지 도무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의문의 답을 그 속에 속한 누군가 알았다면 신학은 소멸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문의 율법인 것입니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완전해지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 체 주구장창 계속 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살 동안 세상에서 성공하여 육신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에 불모 잡혀서, 또 죽어서 천국에 가겠다는 희망 고문에 잡혀서, 또 지키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쌓여서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의문 속에서 지키려고만 하는 그 신앙이 바로 의문에 쌓인 율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의문에 쌓인 율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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